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68 (110704) 상다리

희명화 2015. 4. 8. 21:49



학승이 물었다.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할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거참 훌륭한 질문이야.”

問 純一無雜時如何 師云 大煞好一問

무잡(無雜)은 때가 없고 잡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순일(純一)은 순수한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잡되지 않고 순수한 상태는 질문할 때이다. 질문할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상대를 향하여 궁금한 것을 묻는다. 질문자는 질문 후에도 답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놓는다. 이것만큼 순수하고 깨끗할 때가 또 있을까? 설명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질문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자태 아닌가.

학승이 물었다.
“무위적정(無爲寂靜)한 사람도 침공(沈空)에 떨어집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침공(沈空)에 떨어진다.”
학승이 말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당나귀나 말이 된다.”


問 無爲寂靜底人 莫落在沉空也無 師云 落在沉空 云 究竟如何 師云 作驢作馬

무위(無爲)는 ‘함이 없는 것’이다. 원래 이 용어는 도교에서 쓰던 말인데 불교에서 도교와 약간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도교는 인위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위를 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위를 사용하고 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 사람을 무위적정인(無爲寂靜人)이라고 말한다.

말이 무위적정인이지 어떤 상황하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오르려면 대단히 많은 시간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무위적정인의 경지에 올라갔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경지에 오른 것인가? 아니다. 공(空)에 떨어진 것이다. 공에 떨어진 상태는 어떠한가? 장차 당나귀나 말과 같이 정신이 멍한 축생계에 떨어질 뿐이다.

무위적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수많은 수행자들의 꿈인데 그것도 완전한 경지가 아니라면 그럼 어떤 것이 완전한 경지인가? 일단 무위적정에 들어갔으면 무위적정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마음속에서 세우지 말아야 한다. 한번 얻었으면 곧 잊어버려라. 평범한 사람이 되어서 다시 세상일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 세상에 살면서 마음은 아무 것도 주장하고 세우지 않지만,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주장과 선악시비(善惡是非)를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불교의 마지막 단계는 공(空)에서 나와 평범한 사람이 되어서 평범한 말을 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상다리[床脚]이니라.”
학승이 말했다.
“그것이군요.”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인즉 빼내가거라.”

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床脚是 云 莫便是也無 師云 是卽脫取去

화두가 없는 학인은 선사에게 이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그래서 선사가 답을 내려주거들랑 들은 즉시 깨달을 것이고, 즉시 깨닫지 못했으면 내려준 답을 몇날 며칠이고 탐구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 <조주록>에 나오는 학인은 조주 스님이 ‘상다리이니라’ 라는 것을 듣고 즉시 ‘그렇군요’ 하고 이해를 해버렸다. 이렇게 단정하면 안 된다. 조사의 뜻은 우주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저렇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하고 단정하면 벌써 그렇다는 모양[相]이 생긴다. 단정함으로써 어긋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그렇다[是]면 귀중한 것일 것이니 빼내가거라” 하고 핀잔을 준 것이다.
도대체 달마가 인도에서 온 뜻이 왜 ‘상다리’인가?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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