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66 (110704) 화상은 어느 분으로부터 법을 이으셨습니까?

희명화 2015. 4. 8. 21:49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어느 분으로부터 법을 이으셨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종심(從諗)이니라.”


問 和尙承嗣什麽人 師云 從諗

종심(從諗)은 조주 스님의 법명이다. 조주는 사람들이 불러주던 호이다. 공식적인 칭호는 조주종심선사(趙州從諗禪師)이다. 원래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에게 ‘평상심이 도’라는 말에 깊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남전 스님 옆에서 57세까지 지냈다. 그래서 누구든지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의 법을 이었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자신의 스승은 남전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법명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스승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스승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본래 부처가 아니었다면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법은 배워서 전달 받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스스로 깨어난다. 따라서 스스로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각하는 순간 만법이 갖추어진다. 스승은 법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정말 깨달았는가 그것을 점검해줄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외부인이 만약 ‘조주는 어떤 설법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면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소금은 귀하고 쌀은 천하다.”

問 外方忽有人問 趙州說什麽法 如何祇對 師云 鹽貴米賤

조주라는 지역은 아마도 바다에서 먼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옛날 중국에 어떤 지역은 소금 값이 쌀값보다 훨씬 비쌌다. 조주라는 곳도 역시 소금 값이 더 비쌌던 모양이다.

선(禪)은 있는 것 그대로 말한다. 인위적이거나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그래도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이 차면 차다고 말한다. 더우면 덥다고 말한다. 소금이 귀하면 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말한다. 물이 차서 나쁘다, 더워서 화난다, 소금이 비싸서 미치겠다, 꽃은 피는데 인생은 지고 있으니 슬프다 등의 2단계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조주 스님은 항상 평범한 말 속에서 뜻을 전했다. 조주 선사는 노선사가 될수록 겉치레가 없고 진솔하게 말했다. 공연히 비유를 어렵게 하고 비비꽈서 말해 사람을 당혹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야말로 선(禪)의 진수만 보여준 것이다. <조주록>이 후대로 갈수록 납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네가 부처인가?”


問 如何是佛 師云 你是佛麽

반문을 통한 가르침이다. 학인이 무엇이 부처냐고 묻는데 대하여 부처에 대한 너절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너 자신이 부처이면서 그런 것이나 묻고 있으니 그러고도 네가 부처이냐?” 하고 반문을 통하여 스스로 누구인지 깨닫게 한 것이다.

선(禪)의 정수에 대하여 알아보려면 <법화경>의 ‘탕자의 귀환’을 읽어볼 것도 없이 <육조단경>과 <임제록>을 잘 읽어보면 된다. 육조 스님과 임제 스님은 선불교를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들 선서의 핵심은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있다. 따라서 부처는 이미 되어있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부처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육조 스님이 어찌 하룻밤 설법을 듣고 깨달을 것이며, 임제 스님이 어찌 다만 주장자 3번 맞음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중생은 잠재적 부처’ 라는 식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면 그는 육조가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가 있다. 만약 “너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자기 속에서 ‘마음이 부처’라는 대답이 즉시 일어난다면 그대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인가?”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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