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63 (110622) 장삼 무게가 7근이었어

희명화 2015. 4. 8. 21:48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싫어하는 거야?" (모두가 본분사라는 말)

問 如何是學人本分事 師云 與麽嫌什麽

학인의 본분사는 훌륭한 스승에게 묻고 배우는 것이다. 경지가 높아져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질문이 끊어졌을 때 비로소 학인이라는 딱지를 뗀다.

학인이 제일 먼저 수행해야 하는 것은 좋고 싫은 것을 버리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누가 나에게 와서 좋은 말을 해주면 기뻐하나, 싫은 소리를 해주면 영 개운해하지 않는다. 마음이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것은 불행의 근원이 된다. 어떠한 말, 어떠한 의미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그때서야 감히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수행자는 무엇을 만나도 무엇을 들어도 무엇을 보아도 전혀 싫어함이 없어야 한다. 누가 참선하지 않고 잠을 자도, 누가 좀 지나친 행동을 하여도, 누가 수행자의 본분을 잃고 있어도, 그 어떤 것에도 일단 나의 마음에서 분별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 후 회초리가 필요 한가, 사랑이 필요 한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도인에게 물어보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마음에서 싫어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리더할 사람이고 국가를 이끌고 나아가야할 사람이다.

학승이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때 한 벌의 장삼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 나갔어."

問 萬法歸一一歸何所 師云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종문에 유명한 화두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를 불교에서는 마음(心)이라 하고, 유신론 종교에서는 절대신(神)이라고 하고, 유교에서는 하늘(天)이라 하고,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이야 뭐라고 하건 그렇게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다시 어디로 귀착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주 스님은 '장삼의 무게가 일곱 근' 이라고 말했다. 이 화두의 뜻을 알고 보면 참으로 오묘한 대답이다. 선사들이 즉석에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근본과 지말을 다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과 작용에 대하여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하기 힘들다.

화두는 스스로 푸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누가 알려준다면 그 순간 화두는 죽어버리고 듣는 자는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만다. 화두를 함부로 설명하다가는 남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한 그 누가 화두에 대해서 최적합하게 설명했다 해도 그것은 절대 화두의 뜻일 수 없다. 그렇게 설명되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애당초 화두가 될 수 없다. 다만 듣는 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가 설명은 할 수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그 최후의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내 옆에는 송묵(松黙) 스님이 있다."

학승이 물었다.
"출가(出家)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임금에 대하여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고 부모도 오히려 예배한다."

問 如何是出家兒 師云 不朝天子父母返拜

누구든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평생 '부처의 행'을 행하며 살아간다. 출가한 사람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본래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그동안 세속에 살면서 온갖 의미와 환경 때문에 덧붙여진 거짓의 자기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은 부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 후 온갖 악습을 버리고 참된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간다. 곧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곧 만인의 스승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하니 임금에 대해서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고 부모도 오히려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