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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나무눈이 트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냄새라도 맡은 즉 머리가 깨진다."
학승이 말했다.
"냄새를 맡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가함을 공부하는 자는 없어."
問 萌芽未發時如何 師云 嗅著卽腦裂 云不嗅時如何 師云 無者閑工夫
나무눈이 트기 전은 천지가 갈라지기 전,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본래 자리를 말한다. 즉 만물이 나오기 이전 근본 자리는 어떠한가 묻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주 선사는 그것에 대하여 어떤 낌새라도 알아차리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머리가 깨어져 죽어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근본은 볼 수 없고, 냄새도 없으며, 느낌으로도 알 수 없다. 그것이 본질이다. 만일 약간이라도 알아차린 「무엇」이 있으면 그것은 벌써 조작한 것이다. 근본과 10만 8천리나 멀어진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고 표현하면 곧 어긋난다.
전혀 낌새도 알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알아차리지도 못할 때가 평화로운 것이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해도 역시 틀린 것이다. 이 역시 본질에다 '알지 못한다는 상'을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냄새도 없을 때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없는 한가함을 굳이 공부해서 무엇 할 것인가.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야 말로 근본에 돌아간 사람이다. 부처의 마음 바탕을 깔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알았으면 다만 일어나는 마음만 쉬어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수량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1 2 3 4 5."
학승이 말했다.
"수량에 구속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1 2 3 4 5."
問 如何數量 師云 一二三四五 云數量不拘底事如何 師云 一二三四五
'1 2 3 4 5'. 이것이 수량이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1 2 3 4 5'. 이것이 수량에 구속되지 않는 말이다. 수량이 크다, 적다, 모자란다, 남는다 하고 집착하지 않는 도인도 수에 대하여 '1 2 3 4 5' 하고 말한다.
학승이 물었다.
"어떤 세계가 낮과 밤이 없는 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즉금(卽今)이 낮이고, 밤이야."
학승이 말했다.
"즉금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노승이 어찌 무엇이라 하겠는가."
問 什麽世界卽無晝夜 師云 卽今是晝是夜 不問卽今 師云 爭柰老僧何
밤과 낮은 항상 즉금(현재 이 순간)에 처해있다. 지금 이 순간은 밤 아니면 낮이다. 현재가 낮이면 가장 현실성 있는 순간이다. 현재가 밤이면 이 순간이 가장 현실성 있는 순간이다. 사람은 항상 낮 아니면 밤의 현재에 처해있다. 낮도 현재이고 밤도 현재이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즉금이 밤이고 낮이라고 말한 것이다.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세계는 현재의 반대 세계이다. 알겠는가? 이 외에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http://cafe.daum.net/mubulsun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