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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사방의 산이 핍박해 올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길이 없는 것이 조주(趙州)이다.”
問 四山相逼時如何 師云 無路是趙州
사방의 산이 밀려온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위급한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지구의 종말을 맞게 되거나, 피할 수 없는 병마가 닥쳐오거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거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만나는 것이다. 이럴 때 도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 궁금하여 묻는 것이다.
물론 병을 고치거나 살아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결국 그것도 소용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 때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때를 당하여 무슨 수가 있겠는가. 길이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은 피하지 못한다. 그 때가 지금이다. 두려움도 슬픔도 필요 없다. 고요히 죽음을 받아들여라. 진시황도 죽었고 4대성인도 죽었다.
진실은 죽음(死)도 없고 생(生)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최후의 순간에 어리석게 발버둥 치는가. 생각으로 만들어낸 온갖 가치의 끈을 놓아버려라. 최후의 순간이 오면 마음이 고요해져야 한다. 나는 부처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길로 들어가는 관문이 저 앞에 있다. 당당하고 평온하게 그 길을 향하여 걸어가라.
학승이 물었다.
“옛 궁전에 임금님이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기침을 해 보였다.
학승이 말했다.
“그러시면 신(臣)이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도둑의 정체가 벌써 드러나 버렸군.”
問 古殿無王時如何 師咳嗽一聲 云與麽卽臣啓陛下 師云 賊身已露
옛 궁전은 사람마다 옛날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의 세계를 말한다. 만물이 나온 ‘근원처’를 옛 궁전이라고 비유했다. 그곳에 임금이 없다는 것은 그곳은 ‘무심(無心)’의 세계라는 말이다. 수행자가 근원에 도달하면 무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무심을 얻으면 남이 아무리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해도 화가 나지 않고,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슬퍼하지 않는 대무심 속에 들어간다. 이때의 경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조주 스님은 짐짓 “어험!” 하고 헛기침부터 해 보였다. “임금님이 없기는 왜 없어. 무심이라고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야.” 라는 뜻이다. 진정 무심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이런 조주 스님의 헛기침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공간에 다만 ‘헛기침’만 울릴 뿐, 거기에 이러니저러니 분별망상이 일어날 턱이 없다. 이런 기침에 반응하여 주인이니 신하니 하면서 분별을 일으킨다면 그는 무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남의 경계나 엿보려는 한낱 도둑일 뿐이다. 선사는 다만 헛기침 하나로도 즉시 상대를 간파해버린다. 그래서 “이런 기침에조차 반응하는 자라면 아직 멀은 거야.” 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참[眞]을 참구하는 납자들이여, 조주 스님이 헛기침을 할 때 뭐라고 해야 무심을 이해하는 사람이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노스님의 연세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 줄의 염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어.”
問 和尙年多少 師云 一串數珠數不盡
본 질문은 본 <조주록>의 대화가 어느 때 이루어진 것인가를 알게 해주는 한 단서가 된다. 본래 염주는 108개이다. 그런데 이 108개의 염주 숫자로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조주 스님의 나이가 최소한 108세 보다는 더 되었다는 말이다. 본 <조주록>하편은 도가 완전히 무르익은 100세 이상의 완숙한 나이의 대화록인 것이다. 그런데 선사들은 ‘내 나이가 110세니라’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왜 항상 이렇게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일까? 진실은 ‘나’도 없고 ‘나이’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다. 비유를 들어 알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선불교의 독특한 교시법인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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