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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출가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명성을 얻으려하지 않고 더럽고 추한 것을 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問 如何是出家 師云 不利高名不求垢壞
출가자에게 독(毒)은 명예와 재물이다. 출가자는 세속을 버리고 부모 자식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오로지 마음속의 번뇌를 끊어내고 해탈을 얻기 위함이다. 출가자가 해탈을 얻으면 이번에는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더욱 부모자식을 돌아보기 힘들다.
대장부로 태어나 남들이 다하는 혈육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씻을 수 없는 오명이다. 다만 출가의 뜻이 좋아 그런대로 이해해줄 수는 있다. 그런데 출가하여 해탈을 얻거나 남을 위한 헌신은 고사하고 오로지 일신의 안일만을 위한 명예, 그리고 더럽고 추한 재물에 연연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보다 더 외곡 되고 소졸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라. 부모를 모시지 못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도 하지 못하고, 남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도 아니면서 구차한 한 몸뚱이의 명성과 안일을 위한 재물을 얻기 위하여 부처를 파는 것에 일평생 몸을 바친다면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사기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남을 속이는 도둑의 길을 가려고 출가한 것인가? 뜻 있는 사람들은 뒤에서 욕을 하고 침을 뱉는다. 이러한 수모를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출가한 것인가? 매일 아침마다 이것을 헤아려보아야 출가자이다.
학승이 물었다.
"다만 한 법도 가리키지 않는다 하는데 무엇이 화상의 법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묘산(笷山)의 법을 설하지 않는다."
학승이 말했다.
"묘산(笷山)의 법을 설하지 않는다하셨는데 그러면 어떤 것이 화상의 법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에게 이미 묘산(笷山)의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학승이 말했다.
"하지 않는 것이 그것[묘산의 법] 아닙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아직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단 말이야."
問 不指一法 如何是和尙法 師云 老僧不說笷山法 云 旣不說笷山法 如何是和尙法 師云 向你道不說笷山法 云 莫者箇便是也無 師云 老僧未曾將者箇示人
<금강경>의 핵심 설법은 무상(無相), 무정(無定), 무명(無名), 무위(無爲)이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불법은 한 법도 세우지 않고 있음(不指一法)을 알 수 있다. 불교는 한 법은 물론이고, 한 생각도 세우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로 도교가 불교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인도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에 불경의 언어 몇 가지를 도교에서 쓰는 말로 번역하였다. 대표적인 단어가 무위(無爲)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선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해버리면 곤란하다.
도교와 불교가 유사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이 더 많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경전에 바탕을 둔다. 부처의 마음을 중시하고, 현세에서 해탈을 구하고, 깨달음을 강조하고, 은둔이나 도피가 목적이 아닌 적극적인 삶으로 나아감을 목적한다. 그래서 있는 그 자리에서의 해탈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는 그 무엇도 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묘산의 법도 세우지 않는다. 묘산은 조주 스님 당시 도교사원이 있었던 산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불교도 세우지 않고, 부처도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선사들은 무엇을 가리키거나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조주 스님 역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특별히 보인 적이 없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눈앞에서 홀로 해탈하는 한 길[目前獨脫一路]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2도 없고 3도 없는 거야."
학승이 말했다.
"눈앞의 그 길로 학인이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러다가는 천리만리 멀어져!"
問 如何是目前獨脫一路 師云 無二亦無三 云 目前有路 還許學人進前也無 師云 與麽卽千里萬里
목전에서 해탈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없고 세 가지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한 길만이 해탈하는 길이다. 수행은 여러 길이 있을 것이다. 명상, 요가, 비바사나, 독경, 화두 참구, 주력 등이 있으나 이들 수행은 모두 해탈을 돕는 수행이지, 직접 해탈이 일어나게 하는 수행은 아니다. 진정한 길은 한 길이다. 해탈은 목전에서 일어난다. 염불하다가 한 생각이 툭 터졌을 때 일어난다. 화두를 들다가 한 생각이 툭 터졌을 때 일어난다. 선사의 법문을 듣고 한 생각 툭 터졌을 때 일어난다. 깨달음은 한 찰나에 아귀가 맞는 것이다.
수많은 선사들이 한 길에서 해탈을 얻었다. 그 길은 어떤 길일까? 그런데 그 한 길이 어떤 길이든지 하여간에 그 길조차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은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 길을 버리지 않고 집착하고 있으면 흙을 털어내고 먼지에 앉아있는 것과 같다. 오늘날 도를 닦는 수행자들이 세속의 습성을 버리고 승가의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큰 병통이고 불교가 발전하지 못하는 요인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불의 향상사(向上事)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자네의 발밑에 있어."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어찌 저의 발밑에 계십니까?"
"자네는 향상사가 있음을 원래 알지 못하고 있군."
問 如何是毘盧向上事 師云 老僧在你脚底 云 和尙爲什麽在學人脚底 師云 你元來不知有向上事
향상사(向上事)는 '한 단계 높은 일'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보림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향상사이고, 부처에게는 좀더 효율적인 차원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향상사이다. 비로자나불의 향상사라 함은 비로자나부처님이 지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말한다.
조주 선사가 "노승은 자네의 발밑에 있어"라고 말한 것은 한없는 겸손을 표현한 것이다. 조사가 되고 붓다가 될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낮아지려는 것이 이들의 향상사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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