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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범(凡)에도 있지 않으며 성(聖)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 두 가지를 없애고 온다면 너에게 대답해 주겠다."
학승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였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 인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여기라면 나에게서 일어나지만 거리에서라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어찌 정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지. '오늘 좋은 바람이 분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問 不在凡不在聖 如何免得兩頭路 師云 去卻兩頭來答你 僧不審 師云 不審從什麽處起 在者裡時從老僧起 在市裡時從什麽處起 云 和尙爲什麽不定 師云 我敎你何不道今日好風
진리를 찾는 사람은 범부의 삶에 만족하지도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성인의 삶을 동경하지도 말아야 한다. 진리는 평등하다. 범성(凡聖)은 특별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범성에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학승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한 것은 이전에 한 말을 다 없애버리고 새로 온 사람이 되어 인사한 것이다. 학승은 선문답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라 재치 있게 조주 선사의 두 가지를 없애고 오라는 것에 부응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조주 선사 앞에서라면 조주 선사 때문에 일어났지만, 거리에서라면 누구 때문에 일어나겠는가? 조주 선사는 '바람[風]" 때문이라고 말해야한다고 지시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아침', 혹은 '좋은 저녁'이라고 인사한다. 바다에 가서 때로는 '좋은 바다야' 하고 인사할 수도 있다. 인사는 그 누구, 그 무엇 때문에도 일어날 수 있다. 범성은 물론이고 사물에게도 평등하게 인사하고 지낸다면 곧 범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학승이 물었다.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 두면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여기에 둘 수는 없어."
학승이 말했다.
"만약 여기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장차 데리고 갈 것이다."
問 大無慙愧底人 什麽處著得 師云 此間著不得 云 忽然出頭爭向 師云 將取去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은 최상의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에 심취하다 보면 계율도 필요 없고 질서도 필요 없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생각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만일 어떤 약속을 정해놓지 않으면 사회는 매우 혼란하게 될 것이다. 국법은 진리가 아니다. 법률을 따르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편리를 위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진실을 찾고 진실을 펼치는 사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부끄러움마저 없다면 그 사람은 어느 단체나 어느 사회에서나 몸담아 있을 자격이 없다. 어디건 그런 사람이 갈 곳은 따로 정해져 있다. 조주 선사 역시 감당하기 힘든 후안무치들을 따로 두는 것에 찬성한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사용하여도 나타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용하는 것은 없지 않으나 나타날 때는 누구인가?"
問 用處不現時如何 師云 用卽不無 現時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다.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실천하는 것만 필요하다. 알았으면 바로 행할 뿐이다. 욕심을 내지 않아도 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봉사를 해도 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중생을 제도했어도 제도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착한 일을 했어도 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수행이다.
이렇게 끝없이 사용하여도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들을 줄 알고, 말할 줄 알고, 눈을 끔벅거릴 줄은 안다. 그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그것을 '마음'이라 하면 아직 초심자도 아니다.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고 말해도 틀린다. 손을 번쩍 들어도 아직 9만리나 빗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공겁(空劫) 중에서도 도리어 수행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을 공겁이라고 하는가?"
학승이 말했다.
"무일물(無一物)이 그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비로소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달리 무엇을 공겁이라 하겠는가?"
問 空劫中還有人修行也無 師云 還什麽作空劫 云 無一物是 師云 者箇時稱修行 還什麽作空劫
공겁은 지구가 멸진하고 한 동안 텅 빈 상태의 공간으로 있을 때를 말한다. 그 때에도 수행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조주 스님은 공겁 그 자체가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수행은 마음에 단 하나의 상념이나, 집착이나, 주의주장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텅빈 상태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본성에 회귀하는 행위이다.
불교적 수행은 곧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이미 충만해있음을 믿는 것이다. 무엇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비우는 것이다. 완전히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어지면 그때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자신의 내부에 이미 가득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모델이 바로 역대 선사(禪師)들이다.
선사가 되어도 계속 빔[空劫]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수행이 곧 공겁이라고 말한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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