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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바르게 대수행을 한다.”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도 수행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한다.”
학승이 물었다.
“옷을 입거나 밥을 먹는 것은 보통의 일입니다. 수행을 하시는 것입니까? 안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네가 한번 말해봐라. 내가 매일 무엇을 하고 있는지.”
問 了事底人如何 師云 正大修行 學云 未審和尙還修行也無 師云 著衣喫飯 學云 著衣喫飯尋常事 未審修行也無 師云 你且道 我每日作什麽
요사저인(了事底人)은 ‘일을 마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선문에서 일을 마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일상사 무엇을 할까? 여기에 대하여 조주 선사는 깨달아야 비로소 바른 대수행자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조주 선사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정통 선불교는 돈오점수(頓悟漸修)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말은 원각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던 교가(敎家)의 규봉 스님과, 청량 스님이 한 말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오로지 돈오(頓悟)만 말한다.
돈오라는 말이 쓰여진 지는 오래 되었지만, 선가에서 돈오의 뜻을 확실하게 표명한 선사는 육조 스님이다. 육조 혜능 스님은『육조단경』에서 돈오를 강조하였고, 깨달으면 그 자체가 돈수라 하였다[悟人頓修]. 때문에 돈오 뒤에 굳이 점수나 돈수라는 글자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대승사상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인 것을 깨닫는 순간 완벽한 부처를 회복한 것이다. 따라서 또 다시 닦아서 무엇이 될 것은 없는 것이다.
후대에 규봉 스님은 이러한 선문의 돈오의 뜻을 깊이 파악하지 못하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말하면서 깨달음에 차별이 있다고 보았던 것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가의 판단일 뿐이다. 따라서 돈오돈수라는 말을 하거나 돈오점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규봉의 뜻을 쫓는 사람들이다. 정통 선불교는 오로지 돈오(頓悟)라는 말만 한다.
정통 선불교는 자성을 깨닫고 바로 부처의 행을 행한다. 이것을 육조 스님은 수행불행(修行佛行)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사상은 뒤에 원오 극근 선사가 오후 보림(悟後 補任)이라는 말로 잘 설명하였다. 즉, 스스로 부처인 것은 분명히 알았으나 그동안 습성이 깊은 이유로 부처의 행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 후에도 부처의 행을 익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가 보림 기간인 것이다. 즉, 육조 스님이 깨달았으면 불행을 수행하라고 하였던 것을 그대로 펼쳐놓고 설명한 것이다.
육조 스님의 선법은 닦아서 부처가 되는 선법이 아니고 깨달아서 부처를 회복하는 선법이다. 육조 스님과 신수 스님의 게송에서도 이러한 차별성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닦는 것을 강조하였던 북쪽 신수계의 선법은 나중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종 혜능의 돈법만 남아서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온 선불교라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따라서 정통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육조 스님의 뜻에 조금도 어긋나면 안 되는 것이다.
조주 스님도 정통 선불교의 사상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깨닫고 난 다음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이 문답에서도 깨달아야 ‘바른 대수행’을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 및 일상사에 수행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수행은 물론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수행 체계를 갖추어서 부처가 되려고 정진하는 것과는 다른 수행이다. 조주 선사는 일거수 일투족이 그대로 부처의 행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혹시 부처의 행과 말에 들어맞는지 그것을 늘 점검하며 살아갔던 선사였던 것이다.
낭중(郎中) 벼슬을 하고 있는 최씨(崔氏)가 물었다.
“훌륭한 선지식도 지옥에 들어갑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맨 앞에 들어간다.”
최씨가 물었다.
“대선지식이 되시는 분이 어찌하여 지옥에 들어가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낭중(郎中) 그대를 보겠는가?”
崔郎中 問 大善知識還入地獄也無 師云 老僧末上入 崔云 旣是大善知識爲什麽入地獄 師云 老僧若不入 爭得見郞中
이 법[진리]을 아는 사람들은 개구즉착(開口卽着)이다. 즉, 뭐라고 입만 벙긋하여도 진실과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禪)을 설명하고, 도(道)를 설명한다면서 수많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지옥에 갈 업보를 짓는 것에 불과하다. 선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선사가 죄를 짓지 아니하면 어떻게 사람에게 불법을 설명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불조의 은혜가 한량없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잠자지 않는 눈이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범안(凡眼)과 육안(肉眼)이다.”
조주 스님은 또 말하길,
“비록 천안(天眼)은 얻지 못하였지만 육안의 힘은 이와 같다.”
학승이 말했다.
“무엇이 잠자는 눈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불안(佛眼)과 법안(法眼)이 잠자는 눈이다.”
問 如何是不睡底眼 師云 凡眼肉眼 又云 雖未得天眼 肉眼力如是 學云 如何是睡底眼 師云 佛眼法眼是睡底眼
잠자지 않는 눈은 늘 깨어있는 눈이다. 깨어있으면 실수하지 않는다. 정신이 온전한데 어찌 실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어있는 눈을 보통 불안(佛眼)과 법안(法眼)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 조주 스님은 반대로 범안(凡眼)과 육안(肉眼)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깨달은 선사의 관점이 다른 것이다.
부처의 눈은 오히려 잠들어 있는 눈이라고 하였다. 부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므로 선악이 없고, 길흉도 없는데 도대체 피곤하게 눈을 뜨고 살펴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안은 눈을 감고 감아서 아수라장 같은 세상도 아무 문제없는 세상으로 보고 쿨쿨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안과 육안은 평범한 눈이지만, 사리 분별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가운데 또한 옳고 그른 것이 없는 것도 안다. 따라서 수시로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한 것은 아닌지 깊이 살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중생은 비록 천안은 얻지 못했지만 범안과 육안의 능력은 이처럼 작용력이 크다는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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