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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근본을 버리지 않고 지엽말단을 쫓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정도(正道)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훌륭한 출가승이로군.”
학승이 말했다.
“저는 이제껏 무엇이 출가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는 거야.”
학승이 물었다.
“벗어나야할 집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바로 모름지기 출가해야 돼.”
학승이 물었다.
“그를 편안하게 보낼 곳이 어디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장차 집에 앉아있어라.”
問 不棄本不逐末 如何是正道 師云 大好出家兒 學云 學人從來不會出家 師云 歸依佛歸依法 學云 未審有家可出也無 師云 直須出家 學云 向什麽處安排他 師云 且向家裡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정도를 추구하는 것은 훌륭한 자세이다. 특히 선문(禪門)에서는 지엽말단을 쫓지 않고 근본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엽말단은 선악시비와 장단(長短)에 집착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현자들은 선(善)을 존중하고 악(惡)을 멀리하라하였다. 이것은 지엽말단을 쫓아가는 것이다. 성인은 선악을 다 버리라고 말한다. 선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慈)’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근본을 쫓아가기 때문에 진정한 정도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이다.
출가는 탐진치(貪嗔痴) 삼독을 벗어나는 것이다. 집(家)은 탐진치 삼독의 표상이다. 부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다 보면 탐진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출가하는 것이다. 출가자는 철저히 부처님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들끓고 있는 마음을 잠재워야 한다.
조주 스님은 출가하라 해놓고 나중에는 되레 “그 집에 않아있으라” 했다. 도대체 선사의 뜻이 무엇인가? 선사는 지엽말단을 쫓지 않고 근본을 붙잡는다. 사람이 출가하고서도 여전히 세속적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불타는 이쪽 집을 버리고 화약이 가득한 저쪽 집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출가는 집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집에 앉아있던지 탐진치 삼독을 끊으면 그곳이 바로 진정한 출가이고, 곧 부처가 있는 곳이다.
학승이 물었다.
“눈 밝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본다고 합니다만 도리어 형태(色)도 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 따위 것은 두들겨 없애버려.”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두들겨 없앨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힘쓰지 말라.”
학승이 물었다.
“힘쓰지 않고 어떻게 두들겨 없앨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만일 힘을 쓴다면 바로 어긋나버리고 말아.”
問 明眼人見一切 還見色也無 師云 打卻著 學云 如何打得 師云 莫用力 學云 不用力如何打得 師云 若用力卽乖
진리에 눈뜬 사람은 일체 모든 것에 변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다르고 그의 영혼이 달라지므로 행동도 다르고 말도 다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껍데기를 육안으로 보지 않고 심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에 눈뜨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선지식을 정하여 수년 동안 법문을 듣다 보면, 어느 날 저절로 눈이 밝아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중국의 배휴이다. 배휴는 최종 10년간 재상까지 지내었던 사람이고 평생 수십 권의 불서를 지었다. 배휴는 여러 선사를 찾아가서 법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묵조선의 대가 굉지 스님도 찾아가서 법을 들었다. 나중에는 황벽 스님을 가장 존경하였고, 수년을 다니면서 들었던 것을 기록하여『전심법요』와『완능록』2권을 지어서 재가 불자로서 선서를 남겼는데 오늘날 귀중한 선서가 되었다.
혹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7일간, 혹은 3개월간 잠도 안자고 힘을 쓰면서 용맹정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마음이 힘을 쓰면 쓸수록 깨달음은 더 멀어지는 법이다. 입문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쉬는 일이다.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마음은 푹 쉬어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즉시 그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이 그 무엇도 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때 문득 한 생각이 툭 터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토록 그대가 원하였던 깨달음이다.
학승이 물었다.
“불조(佛祖)의 큰 뜻은 누구에게 적합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다만 요즘 사람에게 적합할 뿐이야.”
학승이 물었다.
“그런데 어찌 얻지 못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이어받아야 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지금 아무도 이어받을 사람 없어.”
학승이 말했다.
“그러면 의지할 것이 없어집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또한 노승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問 祖佛大意合爲什麽人 師云 只爲今時 學云 爭奈不得何 師云 誰之過 學云 如何承當 師云 如今無人承當得 學云 如麽卽無依倚也 師云 又不可無卻老僧
불조의 뜻은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이어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다 사기꾼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어받았다고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인가? 금시(今時)에 불조의 뜻을 이어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대는 원래부터 부처이다. 부처는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는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종국에는 조주 스님도, 스승도 다 물리치고 하늘 아래 홀로 우뚝 서서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것이다. 불조는 그것을 원한다. 요즘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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