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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공겁(空劫) 중에는 누가 주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이 그 속에 앉아있어.”
학승이 말했다.
“어떤 법을 설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가 물은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問 空劫中阿誰爲主 師云 老僧在裡許坐 學云 說什麽法 師云 說你問底
공겁은 성겁(成劫)ㆍ주겁(住劫)ㆍ괴겁(壞劫)ㆍ공겁(空劫)의 네 겁 중에 마지막 공겁을 말한다. 우주는 만들어지고, 머물고, 파괴되고, 비워지는 네 단계를 거쳐 순환 반복한다. 일단 우주가 무너지면 일정한 기간 동안은 텅 빈 상태로 있게 되는데 그것이 공겁이다. 공겁이 지나면 다시 성겁이 시작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주 스님은 공겁을 시간 적인 것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선적이다. 즉, 조주 스님에게 있어서 공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조주 스님은 우주의 진실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 ‘우주는 항상 비워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주가 원래 그러하듯 자신의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비워졌다. 그날 이후부터는 언제까지나 공겁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공겁 중에서 조주 스님은 그 누구, 어떤 사상이나 감정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공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누가 물으면 대답해주고, 묻지 않으면 조용히 심심한 것도 잊은 채 선정 삼매에 들어가 있으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옛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비어있는 빛은 스스로 비춘다.(虛明自照)’라고 했는데 스스로 비추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남이 비추는 것이 아니야.”
학승이 말했다.
“비추지 못하는 곳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네가 말에 떨어진 것이야.”
問 承古有言 虛明自照 如何是自照 師云 不稱他照 學云 照不著處如何 師云 你話墮也
허명(虛明)이라는 말은 ‘빔의 빛’이다. 빔의 빛은 자비, 사랑, 용서, 화합, 지혜, 창의적 발상 등이다. 만약 마음이 비어있지 않고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 걸림이 되어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없는 사랑이나 이해도 ‘빔’에서 시작되고, 자기만의 특별한 아이디어나 발상도 ‘빔’에서 나온다. 이것이 바로 허명자조(虛明自照)이다.
허(虛)라는 말은 비었다는 말이다. 빈 허공에 있는 빛은 비추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처럼 마음도 허공처럼 비워졌다면 이 세상 어디고 비추지 못할 곳은 없다. 범죄도, 이기심도, 추악함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빛이요, 자조(自照)이다. 그러나 마음에 약간의 분별이라도 있다면 도저히 용서되지 못하므로 자비나 사랑은 불가능하게 된다. 마음에 분별이 있으면 빛은 없다. 자조(自照)는 누가 비추게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빛난다. 마음이 비워진 사람은 세상 어느 곳도 다 볼 수 있고, 다 받아들일 수 있고, 다 비출 수 있다. 이것이 자조(自照)이다.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참으로 비워지지 않아서 그렇다. 말만 비웠다고 할뿐 마음 한쪽은 여전히 미움, 분노, 시기, 탐욕, 어리석음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조주 스님은 ‘말에 떨어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허명(虛明) 자체가 빔의 빛인데 마음이 비워졌다면 어찌 비추지 못할 곳이 있단 말인가. 그러하니 말에 떨어지지 말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가장 적합(的)할 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야.”
問 如何是 的 師云 一念未起時
적(的)은 '적합하다', '적당하다', '지당하다', '맞다'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적합으로 번역해보았다. 인생사에서 가장 적합하고 참된 시점이 언제일까? 조주 스님은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야.”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간단하지만 심오하다.
모든 의미, 개념은 다 마음이 만든 것이다. 선악에 대한 정의나 부처와 중생의 차이도 다 마음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의 개념들이 다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 이 개념들은 모두 사람들의 약속일뿐이다. 절대적 선(善)은 없다. 우리는 다만 오늘 이 시점까지는 불합리하여도 그 선을 따르는 것이다.
악(惡), 절대적 악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악이 오히려 선(善)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선악은 없다. 선악으로 인간을 미워하거나 평가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죄를 진 자도 부처이고, 선을 행한 자도 부처이다. 마음에서 선악의 개념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때가 가장 진실과 부합할 때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법왕(法王)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주(州)의 대왕(大王)이다.”
학승이 말했다.
“화상은 대왕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는 모반하는 의심을 지어서 한 왕을 부인하는 거야.”
問 如何是法王 師云 州裡大王是也 云 和尙不是 師云 你擬造反去都來 一箇王不認
석가모니불은 '진리의 왕'이라 하여 당시 왕들이 법왕(法王)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도 훌륭한 선지식을 법왕이라고 불었던 흔적이 여러 곳에 있다. 사람의 왕은 대왕(大王)이지만, 사원의 방장 정도라면 당연히 법왕(法王)으로 불리 울만 하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인(人)의 왕인 대왕(大王)이 곧 법왕(法王)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람이 곧 부처라는 철저한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적으로 부처이다. 그가 대왕이라면 그가 곧 법왕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나라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으므로 둘이라고 하면 모반이 된다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자신을 몹시 낮추면서 한 말이지만 그 말에는 확실한 선적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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