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43 (101201) 무엇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희명화 2015. 4. 8. 21:41



학승이 질문하였다.
“마음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누구를 헤아리는 것인가?”
학승이 말했다.
“자기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두 개는 없다.”

問 在心心不測時如何 師云 測阿誰 學云 測自己 師云 無兩箇

마음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이다. 마음이 작용할 때는 작용하는 마음이 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이 이미 헤아리는 작용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보는 작용을 일으킬 때 마음은 보는 작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본단 말인가. 그래서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고요한 마음이 될 수는 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마음이 자신의 본질에 회귀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함을 떠나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고요한 마음은 사라지고 작용하는 마음으로 변한다. 부처의 마음을 쓰면 부처가 된 것이다. 중생의 마음을 쓰면 중생이 된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주인공의 뜻에 따라 부처와 중생을 넘나들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둘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조주 스님은 “네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라고 지적한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겉이나 끝(邊表)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맑은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학승이 말했다.
“맑은 물병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매우 훌륭한 ‘겉이나 끝이 보이지 않음’이로다.”

問 不見邊表時如何 師指淨甁云 是什麽 學云 淨甁 師云 大好不見邊表

몸은 병(甁)이고 마음은 물(水)이다. 몸은 청정하지만 마음이 청정하지 않다면 병은 탁한 색을 낸다. 몸은 청정하지 않고 마음이 청정하여도 병은 탁한 색을 낸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청정하면 맑은 병에 맑은 물이 담겨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병과 물의 구분은 없어지고, 투명한 그 곳에 병과 물이 있는 지조차도 모르게 된다. 가히 이렇게 된다면 매우 훌륭한 ‘겉이 보이지 않음’이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맑히는 작업이다. 몸과 입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청정한 몸이 되고 마음에 욕심이나 잡념이 없어야 청정한 마음이 된다. 이것이 불조(佛祖)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삶의 방식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고 말하면서 온갖 잡생각을 일으키고, 몸으로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 결국 허망한 육신 아닌가하고 죄를 합리화 시키고 다닌다면 이런 사람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에 불과하다. 선사라면 이런 사람에게 단번에 철퇴를 내리칠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헤아린 즉 어긋난다.”

問 如何是歸根 師云 擬卽差

불교는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본래 자성은 청정하고 깨끗하니까 자기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에 돌아가는 것일까?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마음이 그렇게 헤아리는 것 자체가 본질을 등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별 다른 것이 없다. 헤아리지 말라.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특별하게 수행하거나 굳이 생활을 바꿀 필요는 없다. 다만 머릿속으로 비교하고 헤아리는 것을 중지하고 무심으로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몸은 일하지만 마음은 항상 고요하여, 높고 낮음이 없고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어야 한다.

복을 지으면 복이 오고 악을 지으면 악업이 몰려오는 법이다. 어려움이 몰려온다면 그 또한 나의 업보이다. 기쁨이 온다면 그 또한 나의 선업 결과이다. 어려움도 받아들이고 즐거움도 받아들이면서 무념무심으로 한 세상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근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언구(言句)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독탈(獨脫)을 얻을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언구를 떠난 것이 독탈이야.”
학승이 말했다.
“조금 전에 아무도 저를 여기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럼 무엇으로 인하여 여기에 왔는가?”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어찌 가려내지 못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이미 낱낱이 가려내었어.”

問 不離言句如何得獨脫 師云 離言句是獨脫 學云 適來無人敎某甲來 師云 因什麽到此 學云 和尙何不揀出 師云 我早箇揀了也

학승이 조주 스님을 예방한 것은 누가 가라고 말[言句]해서 간 것이 아니다.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간 것이다. 학승은 조주 스님이 말한 대로 학승 스스로 언구를 벗어난 독탈의 행을 행하였다고 조주 스님에게 맞장구를 친 것이다.

학승이 어찌 가려내지 못하느냐고 반문한 것은 되레 조주 스님을 시험해 보는 말로 대답한 것이다. 소위 막고 찌르는 것을 동시에 한 전형적 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과 문답 말미 조주 스님의 대답도 모두 일점 흠을 남겼을 뿐이다.

만일 본 납자에게 무엇으로 인하여 여기에 왔는가하고 묻는다면, “오늘은 11월 19일입니다”하고 대답할 것이고, 또 학승이 어찌하여 가려내지 못하느냐고 묻는다면, “흠결이 생겼구나”하고 말할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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