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40 (101120) 선문에서 배울 것은 없다

희명화 2015. 4. 8. 21:39



학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학인이 보림(保任)할 물건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은 미래가 다하도록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거야."

問 如何是 學人保任底物 師云 盡未來際揀不出

보림은 보호임지(保護任持)를 말한다. '보호하고 맡긴다'는 뜻이다.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보(保)이고, 자성(自性)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턱 맡기는 것이 림(任)이다. 원래 깨달음 후에 부처의 행을 익히는 시간을 보림이라고 한다.

질문자는 보림할 물건에 대해서 물었다. 자성(本自性)의 정체를 물은 것이다. 자성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지금 즉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마음을 들여다보라. 거기에 무엇이 보이는가? 보이는 사람은 망상을 본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정상이다. 마음은 그렇게 찾아도 찾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마음을 본 사람은 없다. 조주 스님도, 임제스님도, 육조 스님도, 부처님도 보지 못했다. 모두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지 않으나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뿐이다. 이 깨달음이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고 있다.

학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대수행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찰의 유나 화상이 그런 사람이야."

問 如何是大修行底人 師云 寺裡綱維是

'유나'는 절에서 질서와 계율을 잘 지키도록 당부하는 소임 명(名)이다. 일종의 규율 부장과 같다. 남에게 질서와 계율을 잘 지키도록 당부하려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나이 많은 율사 스님들이 유나 직책을 맡는다.

학승이 무엇이 대수행자인가 물은 것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주저 없이 사원의 유나라고 말하였다. 왜 유나라고 말하였을까? 방장도 있고, 국사도 있고, 선원장도 있고, 입승, 찰중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유나를 지목한 것인가. 조주 스님은 수행한다는 그 자체만 볼 때는 유나만한 사람도 없다고 본 것이다.

조주 스님은 물론이고 나머지는 다 부처의 행을 하는 자들이다. 이미 되어져 있는데 또 무엇이 되려고 닦는단 말인가? 깨달은 자들은 닦을 것이 없다. 이것이 돈오(頓悟)이고 정통 선불교의 사상이다. 깨달은 즉시 부처이다. 부처는 부처의 길을 간다. 닦는 자들이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저는 신참자로서 선문(禪門)의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릅니다."
조주 스님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학승이 대답했다.
"혜남(惠南)이라고 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훌륭한 모름이구나."

問 學人纔到 總不知門戶頭事如何 師云 上座名什麽 學云 惠南 師云 大好不知

선문(禪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모르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언어나 의미는 진실이 아니다. 언어나 뜻을 소통하기 위한 '약속'에 불과하다. 언어나 의미에 끌려가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문자를 잊어야 한다. 입차문내 불이문자(入此門內 不立文字)이다. 오로지 모름으로 일관해야 한다. 다만 이름만 알면 된다. 그러면 훌륭한 모름이다. 때가 되어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면 비로소 세상의 이치를 손바닥 안의 일처럼 훤하게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곧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가 된다.

학승이 물었다.
"제가 배우려고 하면 화상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비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물었다.
"자네의 이름이 무엇인가?"
학승이 대답했다.
"도교(道皎)라고 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자는 쌀 창고가 된다."

問 學人欲學 又謗於和尙 如何得不謗去 師云 你名什麽 學云 道晈 師云 靜處去者米囤子

선문에 와서 무엇을 배우려는 자는 선사를 비방하는 자들이다. 선문에서 배울 것은 없다. 선문에서는 스스로 일어서서 부처의 길을 가려고 해야 선사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깨닫던지 못 깨닫던지 상관없이 그대들은 이미 운명적으로 부처이다. 그대들은 출가한 순간부터 일국의 위대한 스승이 된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배운다거나 따라하는 따위의 일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

혹은 은밀하고 조용한 곳에 들어가서 일신의 안위를 얻으려 하거나, 혹은 독살이에 들어가서 홀로 혹독하게 잠자지 않고 수행하겠다는 따위의 일도 다 부질없이 시은만 짊어지고 사는 것에 불과하다.

선문에 들어온 자는 들어온 순간 바로 크게 한번 포효하고 오로지 대장부, 천상천하의 주인, 인류의 위대한 스승의 길, 부처의 길을 즉시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조주 선사는 물론이고 역대 선사들의 빛나는 유훈을 따르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어떤 것이 화상의 큰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어."
학승이 말했다.
"그것이 결국 화상의 큰 뜻이 아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만일 그런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만겁이 지나도 같아지지 않아."

問 如何是和尙大意 師云 無大無小 學云 莫便是和尙大意麽 師云 若有纔毫萬劫不如

크다, 작다, 부하다, 가난하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마음에 그런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절대 진실과 같아지지 않는다. 부처와 같아지지 않는다. 선사는 대의도 없고 소의도 없는 것이 정상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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