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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쪽으로 오너라.”
학승이 말했다.
“그쪽으로 가면 즉시 생각이 미치는 곳입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조주 스님이 손을 곧게 세우고 말하였다.
“그대는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학승이 말했다.
“손이라 부릅니다. 화상께서는 뭐라고 부르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백(百)가지 이름은 나 역시 그대로 부른다네.”
학승이 말했다.
“화상의 백 가지 이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또한 무엇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대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야.”
학승이 예배하자,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네가 생각이 미치는 곳을 가르쳐 주겠다.”
학승이 말했다.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이 바로 그대의 스승이야.”
학승이 말했다.
“조사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옛 사람이 이미 말했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어디 입니까?”
조주 스님은 손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무엇이라 부르는가?”
학인이 침묵하자, 조주 스님은 다시 말했다.
“어찌하여 즉시 깨닫지 못하는가, 다시 무엇을 의심하는가?”
問 思憶不及處如何 過者邊來 云 過者邊來卽是及處 如何是思不及處 師豎起手云 你還作什麽 云 喚作手 和尙喚作什麽 師云 百種名字我亦道 云 不及和尙百種名字 且喚什麽 師云 與麽卽思憶不及處 僧禮拜 師云 敎你思憶得及者 云 如何是 師云 釋迦敎祖師敎是你師 云 祖與佛古人道了也 如何是思抑佛及處 師再擧指云 喚作什麽 僧良久 師云 何不當頭道著 更疑什麽
이 문답을 보면 과거의 선사들은 오늘날 선사와 다르게 자신의 살림살이를 들어내는 것에 그렇게 인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개개인이 부처인 것을 깨달은 진정한 선사라면 모든 부처님 앞에서 굳이 감추고 은밀하게 비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조주 스님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자상한데도 사람들이 오히려 그 저의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미치는 곳에 대해서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옛날에 이미 다 말해 마쳤다. 그러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대해서는 부처님과 조사도 말하지 못하고 가버렸다. 왜냐하면 그곳은 각자 스스로 보아야할 곳이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 가지 명칭을 들어서 말로 설명하면 그곳은 이미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되고 만다.
조주 스님이 일지(一指)를 들었을 때 백 가지 명칭이나 말이나 생각을 내지 말고 다만 그냥 보아라. 그러면 그곳이 바로 백 가지 명칭이나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바로 깨달으라. 그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본 것이다.
손가락이나, 주먹이나, 손수건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달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대담의 뜻을 깨닫기 바란다.
학승이 물었다.
“화상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귀가 먹었어. 더 큰 소리로 물어봐.”
학승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나의 가풍을 물어보므로 해서 오히려 나는 그대의 가풍을 알았다.”
問 如何是和尙家風 師云 老僧耳背高聲問 僧再問 師云 你問我家風 我卻識你家風
조주 스님은 선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선문답을 하는 기지가 남다른 데가 있다. 조주 스님이 “나는 귀가 먹었어. 더 큰 소리로 물어봐.”하고 말하는 것은 답변과 동시에 래방객의 경지를 시험해본 말이다. 소위 막고 찌르는 것을 동시에 한 것이다. 나는 귀가 먹었다고 말했을 때 선객은 벌써 조주를 가늠해야 했다. 그리고 더 큰 소리로 물어보라고 했을 때 즉시 알아채고 다른 질문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선에 초심자인 학승이 조주 선사의 의도를 못 알아채고 재차 큰 소리로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조주 스님은 “그대가 나의 가풍을 알아볼 때 나는 그대의 가풍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나의 가풍이야” 하고 말을 마친 것이다.
누구든지 선을 알면 귀가 막히고 벙어리가 된다. 조주 선사는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다. 만일 내방객이 선에 달통했다면 이 한 마디에 조주의 가풍을 즉시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귀가 먹었어. 더 큰 소리로 물어봐.”하고 말했을 때 똑같은 질문이 아닌 다른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뭐라고 다른 질문을 던져야 좋을까? 만일 본 납자라면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 마디 해보십시오.”하고 질문할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여우나 늑대나 들짐승 같은 그것이다.”
問 如何是平常心 師云 虎狼野干是
평상심에 대해서 조주 스님은 여기서 확실하게 여우처럼 사량계교에 능하고, 늑대처럼 거칠고 이기적이며, 온갖 들짐승 같이 다듬어지지 않는 보통의 마음이 곧 평상심이라고 하였다.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에게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조주 스님이 평상심을 이해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담이다.
사람이 비록 지금 마음이 거칠고 망상이 가득하다하여도 모두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다. 마음은 그렇게 무한히 자유로운 변화를 짓는다. 따라서 분노라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슬픔이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계교모사라고 하여도 부처의 마음에서 나온 작용이다. 이 평상심이 바로 불교에서 지향하여 가는 도(道)의 경지인 것이다.
다만 스스로 부처인 것을 깨달은 자는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지만, 깨닫지 못한 자는 어리석은 이기심을 위하여 사용될 뿐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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