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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노승이 오늘 밤은 대답해줄 것이다. 물어볼 사람은 나오너라."
어떤 승이 겨우 나가서 예배하자,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요사이 나는 기와를 던져버리고 구슬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겨우 아직 굽지도 않은 벽돌 한 개를 얻었을 뿐이군."
師示衆云 老僧今夜答話去也 解問者出來 有僧纔出禮拜 師云 比來抛磚引玉 只得箇墼子
자고로 참된 선지식이라면 언제나 기와를 버리고 환하게 밝은 보배 구슬이 되라고 온갖 방편을 동원하는 것이 정상이다. 조주 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자, 그대들을 깨닫게 해주겠다. 나와서 물어라." 하고 낚시를 던져보았다. 천상천하에 유혹을 당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지 그것을 가려내 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겨우 신참 하나가 나와서 무엇인가 물어보려고 예배를 하고 있으니 이것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나오라는 말에 유혹당하여 나온 애송이도 한심하지만, 아예 나오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질문이 필요치 않는 '해득한 자'라면 이러한 때 얼른 나가서 용의 머리를 잡아채 용의 등을 타고 천하를 한번 횡행해보아야 하는데 그런 기상을 가진 자도 없고, 하릴 없이 총림에 앉아서 나오는 반찬의 미추나 살피고 해제 결제 숫자나 자랑하고 있다면 이 또한 불교를 망하게 하는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주 선사와 같이 자상하고 열렬한 선지식이 있는 도량도 하물며 그러한데, 오늘날 시대를 잊고 신선처럼 살아가는 지위들이 다스리고 있는 도량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도대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학승이 물었다.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없다(無)."
학승이 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왜 개에게는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無 學云 上至諸佛下至螘子 皆有佛性 狗子爲什麽無 師云 爲伊有業識性在
업식(業識)은 전생부터 해오던 버릇을 말한다. 개는 전생부터 내려온 업식에 의하여 동물적 본능을 발휘하고 산다. 청정한 본성보다 업식에 의한 습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도 자기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러하니 불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선문답은 종문의 유명한 화두이다. 사실 조주 스님이 없다(無)고 한 뜻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선(禪)의 핵심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동감하고 있는 바이다. 그래서 무(無)의 참 뜻은 종문의 화두이다. 도대체 조주 스님이 무(無)라고 한 참 뜻이 어디에 있을까? 독자들은 틈틈이 한번 연구해 보기 바란다. 이 화두의 뜻은 너무 강렬하여 사족도 다 녹아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견해는 달지 않겠다.
학승이 물었다.
"법신(法身)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응신(應身)이야."
학승이 말했다.
"저는 응신에 대하여 물은 것이 아닙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다만 응신(應身)과 상관있을 뿐이야."
問 如何是法身 師云應身 云 學人不問應身 師云 你但管應身
온 우주의 본바탕인 부처는 세 가지 몸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 바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다. 법신은 법(法)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형체가 없다. 불교는 우주의 생성과 파괴는 '법'이 하는 것이라는 객관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이름은 '비로자나불'이라고 하였다. 일단 법신은 '법' 그 자체가 나오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법신(法身) 말고 또 다른 객관적 명칭으로는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보신은 중생이 간절하게 보고 싶을 때 나타나 응해주는 응보신이다. 응보신은 눈에 보이는 형체가 있다. 대표적인 이름은 '노사나불'이다. 화신은 중생을 교화하는 스승의 역할이다. '석가모니불'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삼신불은 3가지 다른 작용을 하지만 그 뿌리는 하나이다. 그 뿌리에 대한 명칭은 본성(本性), 불성(佛性), 법성(法性), 각성(覺性), 자성(自性)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법신은 형체가 없고 만법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눈으로 보거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도(道) 그 자체이다. 삼신불에 대하여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보신이나 화신정도이다. 법신은 아무리 알려하여도 알기 불가능하다. 혹 어쩌다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신을 안 것일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학인이 전혀 모를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더욱 몰라."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 지(知:앎)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나는 목석이 아니야. 어찌 모르겠느냐?"
학승이 말하였다.
"훌륭하신 모름이시군요."
조주 스님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問 學人全不會時如何 師云 我更不會 云 和尙還知有也無 師云 我不是木頭 作麽不知 云 大好不會 師拍掌笑之
모르는 것을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자고로 훌륭한 선사들은 다 몰랐다. 선사가 몰라야 법에 맞는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여러 번 설한 뜻이다. 다만 선사는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른 상태이고 학인은 모르고 모른 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른다는 것은 똑같다. 선사가 되면 결국 모르게 되는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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