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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진짜 좋은 솜씨는 졸렬한 솜씨와 같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대들보 재목이 찌부러진 것이야."
問 大巧若拙時如何 師云 喪卻棟梁材
대교약졸(大巧若拙)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이전 구절은 대직약굴(大直若屈)이다. 즉, '가장 곧 바른 것은 굽은 것과 같다'는 말이다. 대교(大巧)는 최고의 솜씨를 말한다. 어느 방면의 최고 솜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치 졸렬한 솜씨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난초를 잘 치는 전문가는 가끔 난초 잎을 꺾어서 땅에 흐드러지게 닿아있는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파격의 미' 라해서 난초의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간주하고 있다. 뛰어난 목수는 곧은 대들보만 고집하지 않는다. 굽은 것도 잘 쓰면 오히려 멋이 된다.
스님도 흘륭한 스님은 계율에 끌려가지 않는다. 계율을 끌고 간다. 신라 시대 원효 스님이나, 대안 스님, 그리고 조선 시대 진묵 스님, 근대의 도인 경허 스님 같은 분들이 바로 계율을 끌고 간 사람들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계율에 끌려갔기 때문에 이 스님들을 보고 때로는 욕을 하였지만, 그 분들은 계율을 끌고 갔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빛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 <조주록>도 잘 살펴보면 조주 스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을 따로 정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원래 진정한 고수가 되면 별도의 형식을 세우지 않는다. 마음은 원래 무궁무진한 것이기 때문에 한번 도(道)를 깨달으면 이야기하는 것마다 다 도가 되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조주 스님이 문하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나는 불(佛)이라는 글자 듣기를 좋아하지 않아."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일하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람을 위하여 일하지."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뜻은 알리지 못하고 한낱 생각만 피곤하게 할 뿐이야."
학승이 물었다.
"이미 '깊은' 이라고 말씀하였는데, '뜻'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근본을 붙잡지 않아."
학승이 물었다.
"그것은 깊은(玄)이 아닙니까, 뜻(旨)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자네에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 뜻(旨)이야."
師示衆云 佛之一字吾不喜聞 問和尙還爲人也無 師云 爲人 學云 如何爲人 師云 不識玄旨徒勞念 學云 旣是玄 作麽生是旨 師云 我不把本 學云 者箇是玄 如何是旨 答你是旨
조주 스님의 "깊은 뜻은 알리지 못하고 한낱 생각만 피곤하게 할 뿐이야."라는 말 한 마디에 선의 깊은 묘미가 다 들어있다. 역대 선사들은 한 곁같이 "평생 한 말 때문에 지옥에 간다느니", "일평생 한 마디로 안 하였다느니…" 등등의 말을 남겼다. <주주록>에서도 조주 스님은 남을 제도한다고 하지만 깊은 뜻을 알리지도 못하고 공연히 사람만 피곤하게 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이런 말들은 선사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선사들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선법(禪法)에 맞기 때문이다.
조주 선사의 법은 항상 "근본을 붙잡지 않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불성, 자성, 법성, 실제리지 등등이 근본이지만, 조주 스님은 그 근본조차도 놓아버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붙들고 있는 것이 없다. 선문에서는 그 근본을 한번 봐버린 후에는 곧 놓아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놔버린 사람들은 부처(佛)이라는 말에도 별 흥미가 없다. 참(眞諦)을 터득한 사람들은 부처라는 말도 버려야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참(眞諦)을 터득한 사람이라면 문자나 명자는 큰 의미가 없고 뜻에도 의미가 없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나 문자나 형상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각자에 선(禪)이 있고 각자에 도(道)가 있다. 만일 사람들이 그대에게 선이란 무엇이며, 도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어떤 학승이 물었다.
"각자에게 선이 있고 도가 있으면 저 옛 부터 지금까지 이야기 해온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자 함이다."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십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몸을 뒤로 빼고 말하지 않았다.
師示衆云 各自有禪各自有道 忽有人問你 作麽生是禪是道 作麽生祗對他 僧乃問 旣各自禪道 從上至今語話爲什麽 師云 爲你遊魂 學云 未審如何爲人 師乃退身不語
석가모니불의 대승불교 근본 교리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도리이다. 이것을 <법화경>ㆍ<화엄경>ㆍ<원각경> 등에서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대승불교의 교리를 가장 먼저 깨닫고 실천한 사람들은 보살들이다. 보살은 세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주었고, 또한 부처님과 동등하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비구들은 여전히 보살과 다른 수행자 집단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부처가 되기 위하여 평생 수행하면서 살았을 뿐, 부처와 같은 행이나 지혜를 별로 드날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비구들이 적나라하게 실천하였던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 선종은 자성은 원래 부처라는 말을 철저히 믿었고, 깨달음을 이룬 선사들도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지하고 부처님 이상 가는 많은 선법(禪法)들을 창안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동양의 선불교의 뿌리이다.
원래 선과 도는 사람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역대 선사들이 한번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배우지 않아도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해서 선불교가 그 흔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들은 다만 후학이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역할만 할 뿐이지, 무엇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중생은 스스로 위대한 부처이다. 때문에 한번 미몽에서 깨어나면 스스로 익히고, 부처로서 가야할 길을 스스로 알아서 간다. 선사가 이 외에 달리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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