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36 (101012) 노승이 수행하면 화(禍)가 됩니다

희명화 2015. 4. 8. 21:38



대부(大夫) 마(馬)씨가 물었다.
“화상께서도 수행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이 수행하면 화(禍)가 됩니다.”
대부가 말하였다.
“화상께서 수행하지 않으시면서 누구에게 수행하라 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대부, 그 분에게 수행하라 합니다.”
대부가 말했다.
“저 따위가 어찌 수행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만일 당신이 수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금과 같이 왕의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굶주려서 몸이 빨갛게 얼은 곳에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대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하고 감사해했다.

馬大夫問 和尙還修行也無 師云 老僧若修行卽禍事 云 和尙旣不修行 敎什麽人修行 師云 大夫是修行底人 云 某甲何名修行 師云 若不修行 爭得撲在人王位中 餧得來赤凍紅地 無有解出期 大夫乃下淚拜謝

조주 스님이 수행하면 화가 된다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선사가 수행하여 복을 지으려는 것 자체가 욕심이 되므로 수행자에게 화가 된다는 말이지만, 사실 조주 스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다. 첫째 수행자는 수행하여도 수행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수행은 곧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선사는 한번 도를 깨달으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 중생은 원래 완벽한 부처이고 깨달음을 통하여 잠에서 깨어났다면 이미 온전한 부처이다. 그런데 다시 또 무엇이 되려고 수행한단 말인가. 선사는 다만 일상사에서 부처의 길을 갈 뿐이다. 혹 부처의 길이 서툴다면 즉시 고쳐서 해나가면 된다. 따라서 수행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깨달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 만일 깨닫고 수행한다면 그것은 불법에 없는 짓을 하는 것이므로 큰 화를 당할 뿐이다.

조주 스님은 수행은 마대부 같은 일반인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생에 왕의 복을 누리는 것은 틀림없이 전생의 복이다. 금생에 그 복을 다 찾아 쓰고 더 이상 복을 짓지 않는다면 노년이나 다음 생에는 극심한 가난와 온갖 고통을 가득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은 복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선사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다. 수행은 스님들보다 보통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끄집어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 노승이 대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그대들은 두 손을 모아 차수하거나 합장하지 말아라. 나 또한 좌선 의자나 불자로서 응대하지 않겠다.”
師示衆云 闍黎不是不將來 老僧不是不底對 又云 闍黎莫擎拳合掌 老僧不將禪床拂子對


“법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들이 어떠한 말과 어떤 행동을 취해도 법은 이미 드러나는 것이고 내가 혹 실수를 한다고 하여도 법을 다 들어낸 것이다. 법은 일상사에 있다. 도가 멀리 있다거나 깊은 곳에 꼭꼭 숨어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미 완벽하다. 나를 만났을 때 선사라고 공연히 양손을 모아 차수하거나 합장하지 마라. 나 또한 법을 들어 보인다면서 좌선의자나 불자를 드는 등의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겠다.

나는 그냥 평범한 노인이고 그대들도 평범한 사람이니 그만하면 됐다. 더 이상 무엇을 구한다거나 어떤 것이 되려고 하는 것은 조작하는 것이고 오히려 때를 묻히는 것인 줄 알라.”는 가르침이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겸허한 설법인가! 오늘날 한국의 큰 선지식의 입에서 이렇게 평범하면서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설법을 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선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래 부처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사람만 있을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만 가지 경계가 일제히 일어나 닥칠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만 가지 경계가 일제히 일어나 닥친다.”
학승이 말했다.
“1문1답은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좌선의자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학승이 예배하려는 순간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문답을 기억하고 있는가?”
학승이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학승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조주 스님이 도리어 큰 소리로 되물었다.

問 萬境俱起時如何 師云 萬境俱起 云 一問一段是起 如何是不起 師云 禪床是不起底 僧纔禮拜次 師云 記得問答 云 記得 師云 試擧看 僧擬擧 師問

만 경계가 동시에 일어날 때는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낸 답이다. 흔히 50대의 남자를 외로운 시기라고 말한다. 50대, 이때 잘못하면 사업에 망하고, 부인과 헤어지고, 건강을 잃고, 부모는 늙어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입원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는데 이곳저곳 모임에서는 찬조금을 좀 달라고 조르는 등의 만 가지 경계가 일시에 닥치는 수가 있다.

이럴 때 선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주 선사라면 다만 있는 그대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보다 더 큰일, 즉 만 가지 일이 동시에 닥쳐와도 다만 만 가지 경계가 일어날 뿐, 목숨을 달라하면 목숨을 주고, 부모를 데려 가겠다 하면 데려가라 한다. 선사는 슬픔과 비참에 젖지 않고 또한 피하지도 않으면서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만 가지 경계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만 가지 경계는 절대 선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없다.

“일문일답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하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선상(禪床:좌선의자)이라고 대답했다. 당연한 대답이지만, 명쾌한 대답이다. 동시에 선의 핵심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것을 조주 스님이 학승에게 부지불식간에 되물은 이유는 그런 급박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는 ‘그것’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조주스님이 학승에게 “일문일답은 이미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고 되물었을 때, 그대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하고 선사는 기회만 있으면 점검하고 또한 중생이 깨달을 수 있는 말을 던져준다.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중생의 몫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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