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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목전의 부처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불당 속의 것이다.”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유형의 부처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곧 마음이다.”
학승이 말했다.
“곧 마음이라고 하여도 한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무심(無心)이다.”
학승이 말했다.
“유심과 무심을 제가 선택하는 것이 허용됩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유심이나 무심은 모두 네가 선택하는 거야. 달리 노승의 지시는 필요 없어.”
問 如何是目前佛 師云 殿裡底 云 者箇是相貌佛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 云 卽心猶是限量 如何是佛 師云 無心是 學云 有心無心還許學人揀也無 師云 有心無心總被你揀了也 更敎老僧道什麽卽得
무심이 부처라는 말은 이미 잘 알려진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 그런 줄 알아야 한다. 깨달음과 아는 것의 차이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깨달으면 정말 그렇다고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냥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이 되어 뇌에 저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은 중요한 순간에 잊어버린다. 분노가 일어날 때 잊어버리고, 슬픔이 일어날 때 잊어버린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무심이 나의 본래 마음이고 참 부처임을 깨달은 사람은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슬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무심이 부처임을 깨달은 사람은 유심과 무심을 다 사용한다. 유심이 필요하다면 유심을 사용하고 무심이 필요하면 무심을 사용한다. 나와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는 것이라면 그것을 사용한다. 세상의 온갖 고통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마음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사용하는 사람을 부처라고 부른다.
깨달은 사람은 삼라만상이 곧 부처인 것을 안다. 산, 나무, 물, 대지, 공기 등등, 우주와 자연은 그대로 부처이다. 스스로 우주이고 스스로 자연이다. 자연에 감사하고 자연에 맞는 삶을 살다가 자연스럽게 간다. 모든 부처가 그러했듯이.
학승이 물었다.
“멀리서 스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말을 안 해.”
학승이 물었다.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나의 가풍이야.”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하지 않는다하여도 사해(四海=사방)로부터 찾아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바다이지만 나는 바다가 아니야.”
학승이 물었다.
“바다 속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의 낚시에 한 마리가 걸렸어.”
問 遠遠投師 未審家風如何 師云 不說似人 學云 爲什麽不說似人 師云 是我家風 學云 和尙旣不說似人 爭柰四海來投 師云 你是海我不是海 學云 未審海內事如何 師云 老僧釣得一箇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주선의 묘미이다. 독자들은 조주 스님이 수많은 말을 하지만 말을 안 한다고 하고 있는 조주 선사의 뜻을 알겠는가. 이것을 안 다면 선을 좀 이해하는 사람이다.
바다는 중생계를 비유한 말이다. “그대는 바다이지만 나는 바다가 아니야.”라는 말은 그대는 중생계에 속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즉,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도 나는 중생이 될 수 없고 선을 실천하기 위하여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승이 가풍을 묻던 주제에서 벗어나 돌연 “사바세계를 어떻게 보십니까?”하고 사바세계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가풍에 대한 말미에 “잘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라도 마무리를 하기도 전에 다른 주제를 들고 나오는 학승에게 “그렇게 주제를 잃고 말에 따라다니다가는 낚시에 걸린 물고기 꼴이 되고 말아.” 하고 일침을 준 것이다.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항상 그렇게 유혹당하면서 사는 것 밖에 더 뭐가 있겠어.” 라는 식이다.
학승이 물었다.
“어떤 방편을 써야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법문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아직 들은 적이 없는 법문은 우선 놔두고 자네는 이제까지 무엇을 들어왔는가?”
問 作何方便卽得聞於未聞 師云 未聞且置 你曾聞箇什麽來
불교는 말할 수 없는 곳을 말하고 있고, 또 알 수 없는 곳을 알라고 강조한다. 말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왜 굳이 깨달으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의 정점은 말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항상 말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말과 명칭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서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어떤 의미를 약속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말과 명칭이 진실은 아니다. 그런데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말과 명칭과 생각에서 진실을 찾는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진실은 항상 저변에 있다.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말과 명칭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이러한 질문을 안고 출가한 학승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법문은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네가 이제까지 들은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물으므로 써 스스로 답을 찾게 하였다.
잘 생각해보라. 상반되는 이쪽과 저쪽은 서로 맞물려있다. 이쪽을 안다면 저쪽을 알고 저쪽을 알면 이쪽도 알게 되어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각종 진리를 다 버려보아라. 그런 다음 무엇이 있는가 생각해보라. 거기 남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저쪽의 소식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