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39 (101120) 불조중생(佛祖衆生)

희명화 2015. 4. 8. 21:39



학승이 물었다.
“부처님과 조사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부처님과 조사가 아닌 사람이야.”
학승이 물었다.
“어째서 가까이 갈 수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에게 ‘부처나 조사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어떠하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름이 있다면 곧 불조중생(佛祖衆生)이야.”
학승이 말했다.
“다만 그렇게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마침내 자네가 가는 곳과 달라졌다.”

問 祖佛近不得底是什麽人 師云 不是祖佛 學云 爭奈近不得何 師云 向你道不是祖佛不是衆生不是物得麽 學云 是什麽 師云 若有名字卽是祖佛衆生也 學云 不可只與麽去也 師云 卒未與你去在

부처와 조사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 부처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부처이다. 조사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조사이다. 부처는 부처를 알아보고 조사는 조사를 알아보는 법이다. 따라서 부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부처이고 조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조사이다. 경지가 같지 않으면 절대 가까울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한계이다.

그러면 불조와 가깝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도 아닌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명 부처의 후손이고 부처의 심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원천적으로는 중생이 아니고 부처이다. 그러나 자신이 부처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딱히 현재 부처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부처와 중생의 중간 쯤 되는 어떤 물건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부득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조중생(佛祖衆生)이다. 부처이기도 하고 중생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설명했더니, 학승은 불조(佛祖)와 중생(衆生)을 동시에 쓰는 이름은 있을 수 없다고 항변하였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학승에게 “마침내 자네가 알고 있는 불교와 내가 알고 있는 불교가 달라졌다.”라고 하면서 말을 마쳤다. 도대체 누구의 불교가 옳은 것인가? 그것은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학승이 물었다.
"경전에 보면 색을 따라 변하는 마니주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무엇이 마니주의 본래 색입니까?"
조주 스님은 학승의 이름을 불렀다. 학인이 대답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학승이 가까이 다가가서 또 물었다.
"무엇이 마니주의 본래 색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자, 또 색을 따라 가거라."

問 承敎有言 隨色摩尼珠 如何是本色 師召僧名 僧應諾 師云 過者邊來 僧便過 如何是本色 師云 且隨色走

마니주가 노랑색을 보면 노랗게 변하고 붉은 색을 보면 붉게 변하려면 자기의 색이 없어야 한다. 투명하여야 무슨 색을 보아도 그 색으로 변할 수 있다. 여기서 마니주는 사람의 본성에 비유하고 있다. 조주 스님은 마니주의 본색은 무색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문답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마니주는 본래 색이 없다. 파란 색을 보면 파랗게 비추고 검은 색을 보면 검게 비출 뿐이다. 그대의 본성도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 무주(無住) 사상이 있다.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 이 말은 분노, 슬픔, 자만, 사상, 보시 등등의 그 어떤 정신적 현상이나 언어적 개념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이다. 무념이나 무심과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주 선사의 마니주 설법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어느 곳 하나에 정해져 있으면 반드시 그로 인하여 괴로움이 몰려온다. 마음이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지 물질적인 것이든지 상관없이 행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어야지 끈덕지게 집착할 바는 못 된다.

학승이 물었다.
"평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역시 교화를 받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 문 앞을 지나가지 않아."
학승이 말했다.
"그러면 빠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음, 좋은 평상심이군."

問 平常心底人 還受敎化也無 師云 我不歷他門戶 學云 與麽則莫沉卻那邊人麽 師云 大好平常心

조주 스님은 평상심을 늑대나 여우와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분노, 기쁨, 희열, 욕망, 사랑, 미움 등 중생의 전형적인 평상 심리가 평상심이다. 중생은 본래 깨끗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평상심이 나온다. 선사는 나날이 무념무심으로 살아간다. 선사의 평상심은 무념(無念)이고 중생의 평상심은 유념(有念)이다. 선사는 중생의 평상심에 근접하지 않는다. 근접하였다면 그는 진실을 깨달은 자가 아니다.

들짐승과 같은 마음을 내고 살아가는 사람도 교화를 받을 수 있을까? 이것 골치 아픈 질문이다. 그러나 선사는 평상심에도 관심이 없고 남이 제도를 받건 말건 도무지 관심이 없다. 왜냐? 중생은 언젠가 운명적으로 스스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본성은 부처이다. 본성이 부처이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 스스로 알게 된다. 그가 이미 부처인데 누가 누구를 제도한단 말인가? 교화에 대해서 선사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선사의 유일한 관심은 그가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여기에 온통 관심이 있다. 누구든 즉시 부처의 마음을 쓰면 부처이나 중생의 마음을 쓰면 중생이다. 다른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을 구해주려는 마음을 쓴다면 선사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왜냐하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