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41 (101120) 나오면 죽는다

희명화 2015. 4. 8. 21:39



학승이 물었다.
"'만법(萬法)은 본래 한가하다. 사람이 스스로 시끄럽게 할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의 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오면 죽는다."

問 萬法本閑而人自鬧 是什麽人語 師云 出來便死

여기서 만법(萬法)은 '모든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불교는 만물을 생성시키고 기르고 멸망하게 하는 것을 法(법칙)이라고 부른다. 근원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와 동시에 法이 있어서 만물이 벌어졌다. 그래서 만물을 법, 즉 만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법은 물질적인 것만 이르는 말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과 어떤 의미까지 다 포함하여 만법이라고 지칭한다.

삼라만상 유정무정은 본래 한가하다. 본래 고요하다. 수많은 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고요한 가운에 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시끄럽고, 슬프고, 복잡하고,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시끄러워서 그렇다. 정말 그렇다. 마음이 동요하고 있으면 시끄럽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은 항상 고요하다.

그런데 '만법이 본래 한가하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스승의 스승을 계속 추적해간다면 결국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다. 만일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뭐라고 설명하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다. 설명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데 누가 감히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학승이 물었다.
"부처가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라는 말은 단견(斷見)입니다. 어떤 것이 부단견(不斷見)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

問 不是佛不是物不是衆生 這箇是斷語 如何是不斷語 師云 天上天下唯我獨尊

단견은 부정적인 시각이다. 모든 것은 부정하는 견해이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단견이다. 그 반대, 그대는 부처이다. 저것은 물건이다. 그대는 중생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향수가 좋다. 짜다, 싱겁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부단견이다.

불교는 단견과 부단견을 다 주장하지 않는다. 양자는 다 바른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양자를 주장하지 않는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여기에 조주 스님이 견해를 보였다. 바로 '천상천하무여불' 하고 외친 것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사람이 단견을 주장하면 부단견을 보이고, 부단견을 주장하면 단견을 보여서 양자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모두 허망한 마음이 만들어낸 개념들이기 때문에 양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양자를 떠나면, 부처의 삶을 가게 된다. 그대는 돈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돈이 들어오지 않는 삶도 거부하지 않는다. 부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가난한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정권을 맡겨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대가 평범한 삶을 사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이것이 부처의 삶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불의 원상(圓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어려서부터 출가한 이래 안화(眼花)를 본 적이 없어."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사람을 위하지 않으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원컨대 그대가 오랫동안 비로자나불의 원상 보기를 원하노라."

問 如何是毗盧圓相 師云 老僧 自小出家 不曾眼花 學云 和尙還爲人也無 師云 願你長見毗盧圓相

비로자나불은 삼신불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부처이다. 일명 법성신(法性身)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제 비로자나불은 전생에 수없이 수행하여 우주의 근원인 법성과 같아진 부처이다. 원상은 부처의 뒤에 있는 둥근 일원상(一圓相)이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인자한 빛이 일원상이다.

안화(眼花)는 눈병이 났을 때 있지도 않는 꽃들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이다. 실제 안화를 보려면 눈을 약간만 심하게 눌렀다 떼면 된다. 그러면 금방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안화를 보게 될 것이다. 안화는 사실이 아니다. 눈병이 났을 때 생긴 허망한 현상이다. 사람이 아직 깨어나지 않으면 원상이 보인다. 바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원상이 보일 리 없다. 다만 선사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원상의 신비를 말해주면서, "그대가 반드시 눈을 떠서 부처님의 원상과 같은 자비한 빛을 내거라" 하고 독려할 뿐이다.

그런데 이 문답의 말미를 젊은 선사들이 본다면 반드시 지적 받아 마땅할 것이다. 100세가 넘은 조주 화상이 망령이 났다고 일갈을 할 만하다. 중생을 위하여 해주는 말이 되레 중생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주 스님의 잘못을 알아챈 납자들에게 묻겠다. 말미를 뭐라고 해야 중생을 위하는 말이 되겠는가? 만일 본 납자라면, "나는 지금 사람을 위하고 있어" 하고 말할 것이다. 그 저의를 알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다 없어졌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원컨대 그대여, 대덕이 되어라. 노승은 불조의 장애나 되는 자이다."

問 凡聖俱盡時如何 願你作大德 老僧是障佛祖漢

여기서 범인(凡人)은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사람을 말한다. 성인의 반대 개념이다. 불교는 양자를 갈라진 것이 도리어 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반야심경>과 <신심명>의 대표적 사상이 바로 상대적인 양변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성인과 범인이 없는 세상이 된다면 세상은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사악함과 어리석음이 없다면 지혜나 인자함은 따로 필요 없다. 범인과 성인이 없다면 이 세상은 평범한 사람만 남는다. 그렇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전쟁도 없고 따로 평화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지상낙원이요, 불국토이다.

범성이 없어지고 평범한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방할과 격외구를 구사하는 선사는 필요 없다. 이미 옛 조사들이 꿈꾸던 세계가 건설된 것이다. 선사는 조사들의 뜻에 반하는 장애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가장 큰 덕을 갖춘 사람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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