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35 (101012) 낭월당공(朗月當空)

희명화 2015. 4. 8. 21:37



학승이 물었다.
"밝은 달이 허공에 당당하게 걸려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학승이 대답했다.
"아무개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밝은 달이 허공에 당당하게 걸려있는 그곳이 어디인가?"

問 朗月當空時如何 師云 闍黎名什麽 學云 某甲 師云 朗月當空在什麽處

낭월당공(朗月當空)은 구름도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낭낭하게 떠있는 상태를 말한다. 선가에서는 화두가 성성하게 들려서 화두를 버리려고 하여도 버려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보통 몸중일여(夢中一如)에 도달하기 전에 나타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선객들이 성성하게 화두가 들려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고 온전히 하나에 몰입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낭월당공에 도달하면 조만간 깨달음을 얻게 되므로 축착합착하고 줄탁동시가 오려는 전조 단계이다. 누가 낭월당공의 경지에 오르면 본인은 물론이고 종문의 경사이다.

선사는 오차 없이 지도하여야 한다. 우선 낭월당공에 대한 정확한 뜻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학승이 낭월당공에 들어가서 어디 하나에라도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공부를 망치게 되므로 선사의 지도는 항상 법에 맞아야 한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우선 학승더러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때 학승은 또렷하게 자기의 이름을 거명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르침이다. 자신의 이름을 낭낭하게 거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낭월당공의 경지와 같다.

이것을 경험하게 해주고는 곧바로 "밝은 달이 허공에 당당하게 걸려 있는 그곳이 어디인가?"하고 낭월당공이 걸려 있는 그곳을 물은 것이다. 이렇게 물으면 학승은 순간 깨어나던지, 아니면 그곳이 어디인가? 하고 새로운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지도하므로 해서 낭월당공에 빠지게 되는 과오를 수정해 주고, 또 공부가 익은 납자라면 순간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16일에 당하면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동쪽은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이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동쪽은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찾아도 찾을 수 없어."

問 正當二八時如何 師云 東東西西 學云 如何是東東西西 師云 覓不著

16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당시 상황이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절에서 6, 16, 26일은 빨래하는 날이다. 이 날 이가 죽으면 천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 하나 16일은 해제 다음 날로서 선객들이 사방으로 만행을 떠나는 날로 추측해볼 수 있다.

3개월 수행이 끝나 해제하면 일정 기간 동안 선객들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자 만행을 떠난다.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어떤 방향이던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떠난다. 혹은 훌륭한 선사를 찾아가서 궁금한 것을 묻고 깨닫기 위하여 목적지를 두고 가기도 한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하지 않았는가? 동쪽으로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마라. 발 가는 것에 답이 있을 수 없다. 공부하는 수행자의 조그마한 한 멋이 바로 아무 곳이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설사 가다가 되돌아 온다하여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그게 무슨 인생이냐고 묻지도 마라! 인생의 의미는 원래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도인(道人)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을 불인(佛人)이라고 한다네.”

問 如何是道人 我向道是佛人

도인(道人)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중국에서 불리던 호칭이다. 동양에서 도(道)는 만물의 근원을 말하고, 만물의 근원에 준하여 생활하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한다. 혹은 도가(道家)적 수도인을 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도를 행하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인(佛人)은 깨달은 사람이다. 부처(佛)라는 말은 성인의 의미에 가까운 말이지만, 불인은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특별함 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도를 깨달은 것을 강조한 말이다.

조주 스님은 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을 불인(佛人)이라고 하였다. 즉, 조주 스님은 동양에서 만물의 근원을 도(道)로 본다면 그 도를 향하여 가는 사람이 곧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도(道)라는 말이 도가적 용어라고 하여도 만물의 근원을 지칭한다면 불인이 곧 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나 법성이 동양에서 말하는 도와 같은 의미이므로 굳이 명칭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인 것이다. 불교의 통합과 회통의 정신을 잘 보여준 선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학승이 물었다.
“대저 뭐라고 말하거나 손을 올리거나 발을 움직이거나 하면 모두 학인의 그물 속에 떨어집니다. 이것들을 떠나서 스님께서 말씀해보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노승은 점심을 먹고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어.”

問 凡有言句擧手動足 盡落在學人網中 離此外請師道 師云 老僧齋了未喫茶

여기서 학인의 그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도의 그물이다. 도를 표현하는데 언구나, 손발을 써서 그것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그물에 걸린 것 일뿐이다. 뿐만 아니라, 묵언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물에 걸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선문답에서 가끔 거론하는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한 마디 이르라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흔히 이러한 질문은 선사가 학인에게 내리는 질문이지만 학승이 선사에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도를 깨달은 선사라면 이러한 질문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설사 학승이 선사를 시험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답하여 학승의 신뢰를 얻는 것이고, 혹 선사의 답변으로 학승이 깨닫는다면 그것은 큰 소득이기 때문이다. 조주선사 역시 망설이지 않고 즉시 답변하였는데 참으로 기묘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노승은 점심을 먹고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어.”라는 이 한 마디는 선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천하의 변재들도, 기연연구나 할을 잘 쓰는 대종장들도 여기서는 할 말을 잃는다. 도대체 조주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원래 여기에 사족을 붙이지 못하지만 독자들을 위하여 부연 설명을 하자면. “조주 스님의 둔갑술은 제갈공명도 두 손을 든다.”고 하겠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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