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33 (101012) 제 1구에 깨달으면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

희명화 2015. 4. 8. 21:37



조주 스님이 문하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부처를 염(念)하는 일이나 법(法)을 염(念)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 자신의 염(念)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반려(伴侶)가 없습니다."
조주 스님은 혀를 차면서 야단치듯 소리를 질렀다.
"이 당나귀야!"

師示衆云 不得閑過念佛念法 僧乃問 如何學人自己念 師云 연자是誰 學云 無伴 師叱者驢

자기 자신에 대한 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생각하는 염법(念法)을 말한다. 오늘날 간화선과 비슷한 선불교 초창기의 염법이다. 조주 스님이 학인에게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물은 것에 대하여 학인은 "반려(伴侶)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사실 이 대답은 흠을 잡을 곳이 없을 듯해 보인다. 나(我)는 원래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는 것이므로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혀를 차면서 야단치듯이 "이 당나귀 같은 놈아!" 하고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래가지고는 천방지축으로 이리 저리 날뛰는 당나귀 밖에 더 이상 될 것이 뭐있나?" 하는 뜻이다.

염하는 자에 대하여 학승은 분명 일리가 있는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조주 스님은 호통을 쳤다. 도대체 이 말은 어디에서 흠이 있는 것일까? 독자들은 한번 연구해 보길 바란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만일 본 납자에게 "염하는 자가 누구인가?"하고 묻는다면 본 납자는 "나무 불, 나무 법, 나무 승!"하고 말하겠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이때 어떻게 해야 조주 스님에게 야단을 맞지 않겠는가?

조주 스님이 법당에 나와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만일 제 1구라면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 제 2구라면 인간계ㆍ천상계의 스승이 된다. 제 3구라면 자신도 온전하게 구원하지 못하리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제 1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불조(佛祖)의 스승이 된다."
조주 스님이 거듭 말하였다.
"그런데 앞부터 제기(起)한 것은 것이 참 좋은 거야."
학승이 다시 한 번 더 묻자, 조주 스님이 말했다.
"웬걸, 이번에는 인천(人天)으로 갔군."

上堂示衆云 若是第一句 與祖佛爲師 第二句 與人天爲師 第三句 自救不了 有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與祖佛爲師 師云 大好從頭起 學人再問 師云 又卻人天去也

제 1구는 첫 마디이고, 말의 우두머리이고, 禪의 핵심을 요약한 한 마디이다. 제 2구는 재차 설명하는 말이고 좀 쉬운 말이다. 제 3구는 거듭 아주 쉽게 해석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제 2구나 제 3구에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이해는 하겠으나, 제 2구나 제 3구에서는 절대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서는 한 낱 어떤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선사가 하는 첫 마디, 제 1구에서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가히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되고도 남는다. 조사나 부처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오늘날 깨달음을 얻은 붓다라면 오래 전의 붓다들에게 가르칠 것이 참 많을 것이다. 그동안 남기고 간 수많은 붓다들의 이력을 다 섭렵하고 있기 때문에 선배 붓다들에게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묘한 방편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 1구란 도대체 어떤 류의 말인가? 여기서 조주 스님은 분명 학승에게 제 1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학인이 제 1구를 알아채지 못하고 거듭 물어보므로 해서 학승은 제 2구, 3구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주 스님의 1구는 무엇인가? 바로 "불조(佛祖)의 스승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제 1구이고 선문(禪門)의 오묘한 법을 일러준 한 마디이다. 납자들은 이제 제 1구가 보이는가? 만일 보인다하여도 이미 본 납자의 설명이 들어갔기 때문에 2구나 3구를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주 스님의 이 1구는 무슨 뜻인가? 이것을 설명하면 금방 2구가 되므로 설명은 할 수 없고 이와 유사한 말을 대신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불조(佛祖)는 불을 지르고 제 1구를 아는 자는 불을 끈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일렀다.
"이것은 그가 끄집어내지 않음도 아니고 내가 대답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장차 무엇으로 대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은 길게 일성(一聲)을 울렸다.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장차 그것으로 대답하시는 것이라면 학인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가 조금 전에 나를 긍정하였다면 나는 그대의 부탁을 저버린 것이고, 만일 나를 긍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대의 부탁을 저버린 것이 아니야."

師是衆云 是他不是不將來 老僧不是不祗對 僧云 和尙將什麽祗對 師長吁一聲 云和尙將這箇祗對 莫辜負學人也無 師云 你適來肯我 我卽辜負 若不肯我 我卽不辜負你


선객들의 주제는 항상 도(道)나 선(禪)에 대한 것이다. 대담 중에 주제어가 빠져있으면 그것이 곧 도에 관한 주제인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학승들이 선사에게 와서 질문할 때마다 사실 그것이(道) 들어있지 않음이 없다. 다만 학승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선사가 어떠한 방편을 쓰던 역시 그것이(道) 들어있지 않음이 없다. 다만 눈이 어두운 자는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이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준다면 어떻게 알리는 것일까? 학승의 이 질문에 조주 스님은 '장탄식'을 해 보였다. '장탄식', 이 어찌 도를 들어 흔들어 보임이 아니겠는가? 그러하지만 눈 밝은 납자라면 이 '장탄식'에 하자(瑕疵)가 있음도 보여야 한다. 다행이 학승이 그 하자를 찾아내어 조주 스님에게 "그런 표현을 하시다니, 대단히 실망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그대의 부탁에 부응코자 한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마쳤다. 이 또한 2구가 되지만 대중을 위하여 마지막에 부언해둔 것이다.

그런데 학승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 곧 부탁을 들어준 것이라 하였으니, 납자들은 조주 스님의 그 내밀한 의도를 알겠는가? 이 뜻은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의 질문에 주장자 3번을 내린 뜻과도 같다.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빨리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기 바란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