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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용녀가 마음으로 친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일'일 뿐이야." 학승이 물었다.
"이미 자연적인 일이라면 공양 올리는 것은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만일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자연적인 일임을 알겠는가?"
師示衆云 龍女心親獻 盡是自然事 問旣是自然 獻時爲什麽 師云 若不獻爭知自然
자연(自然)이라는 명사적 의미는 오늘날 정착된 단어이다. 예전에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 라는 형용사적인 의미였다. 자연사(自然事)를 요즘의 말로 하면 '자연적인 일' 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즉,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말한다.
조주 스님은 <법화경>에서 용녀가 보배구술을 가져다가 부처님께 공양올린 것을, 거기 분명 용녀가 인위적으로 공양 올렸던 사건을 두고 자연적인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학인이 용녀의 헌공은 분명 자연적인 일이 아니고 인위적인 일이지 않느냐고 되물은 것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분명 용녀의 헌공을 자연적인 일로 보았다. <법화경>에 보면 용녀는 보배구슬을 부처님께 올리고 곧 성불하였다. 그렇다면 용녀는 귀한 보배를 공양 올리고도 올렸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된다. 보배를 올리고도 올렸다는 생각이 없다면 그 사건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의 일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그리고 그 사건이 자연적인 일인지 인위적인 일인지 알려면 귀한 보물을 공양 올려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도 한번 시험해보라. 귀한 보물을 부처님께 올리고도 올렸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이다.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그 일은 무심히 벌어지는 대자연의 한 일일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가령 부처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곳에도 수행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 두 가지가 없어도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느니라."
학승이 물었다.
"도인(道人)이 왔을 때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인이라면 수행하지 않을 거야."
학승이 예배하자,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를 둘 큰 장소가 있어."
問 無佛無人處 還有修行也無 師云 除却者兩箇 有百千萬億 學云 道人來時在什麽處 學云 你與麽卽不修行也 其僧禮拜 師云 大有處著你在
수행은 그른 것을 바르게 가도록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조주 스님은 이런 수행은 설사 부처가 없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백천만억의 수행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세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세계는 사람 말고도 많은 생명이 있다. 그들 중 동물의 세계를 관찰하여 보면 거기에도 그른 것을 바르게 가도록 하는 법칙이 행해지고 있다. 서열이 있고 약자는 사라지고 강자는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있다. 그러한 법칙을 인간의 잣대로 옳다 그르다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연에서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공평한 법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서로 서로 그 법을 이어가도록 훈련하고 교육을 시켜준다. 그들만의 수행인 것이다. 또 식물의 세계에서도 유전을 통한 진화라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법을 지켰을 때는 순조롭게 진화하지만 법을 어겼을 때는 사멸하고 만다. 이러한 냉혹한 법칙을 식물들도 대대로 경험을 통하여 안다. 따라서 식물의 세계에서도 훈련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알 수 없는 많은 세계에서도 바르게 나아가기 위한 수만 가지 수행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주 스님의 관점에 대하여 학승은 도를 터득한 도인(道人)을 내세워 도인은 수행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설사 도인이라 하여도 수행은 필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본 <조주록>에서도 노화상인 조주 자신도 수행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선문(禪門)에서 수행은 부처의 행을 행하려는 노력이다. 도를 깨달았다하여도 수많은 진화의 세월 동안 익혀온 습관은 하루아침에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도인도 끝없이 수행해야 한다. 역대 선지식의 법은 도를 깨달아도 수행하는 법이다. 물론 도인의 수행은 좀더 세부적인부분까지 나아간 수행일 뿐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도인이 된다면 그는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만하고 있다가는 나중에 반드시 팔만사천 대지옥을 참관할 기회를 만나고 말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백운(白雲)이 떨어지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기상에 대해서는 몰라."
학승이 말했다.
"어찌 주객이 없을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주, 자네는 객이야. 백운 따위가 어디에 있나?"
問 白雲不落時如何 師云 老僧不會기象 學云 豈無賓主 師云 老僧是主黎是賓 白雲在什麽處
이 문답은 명칭에 집착하는 학승을 경책해주는 내용이다. 백운(白雲)은 흘러가는 구름이고 청산(靑山)은 우둑 솟는 산이다. 골짜기가 깊은 산일수록 백운이 몰려와 모인다. 이것을 비유하여 운수납자들은 백운(白雲)이라 하고 총림에서 사람을 지도하는 방장이나 절의 대소사 소임을 보는 사람들은 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백운은 좋은 스승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청산에 얼마간 머물다가 곧 떠나가는 자유로움이 있고 때로는 그것을 운수승의 멋스러움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에 반하여 청산은 맡은 임무가 있어서 몇 년씩 절을 떠나지 못하고 묶여 있게 된다. 사원의 주지나 총무, 재무 소임을 사는 사람들은 주로 근기가 낮고 우둔하여 공부의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때, 한동안 대중을 보필하는 복이나 짓겠다고 자원한 사람들이다. 그러하므로 가끔 보필을 받는 백운 납자들이 자신들은 우월하고 청산 소임자들은 하열하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미숙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이러한 백운들의 오만함을 조주 선사는 꼬집어 준 것이다. 이곳은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만 있지 백운이니 청산이니 하는 명칭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가끔 보면 수행자에게 있어서 명칭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명칭에 목은 메는 자들이 있다. 주지, 의원, 대표… 이러한 명칭들은 도를 닦는 납자들에게는 한 낱 뒷간에서 쓰다 버린 휴지보다도 더 더러운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냄새나는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폼을 내고 있는 자가 있으니 불교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불을 향하여 달려드는 불나비 같은 수행자가 바로 명칭을 향하여 쫓아가는 자들이다.
기상에 대하여 모른다는 말은 조주 스님이 백운이 많이 몰려오던지 덜 몰려오던지 상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방장이 훌륭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통하게 해주면 많이 몰려오겠지만, 선사의 법은 항상 무뚝뚝하고 본질을 향한 한 두 마디가 전부인데, 어찌 미숙한 백운의 심정에 일일이 맞겠느냐는 것이다. 사람이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납자의 간절한 마음에 있는 것이지 선사의 법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들은 좀처럼 방할과 격외구를 버리지 않는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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