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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선가(禪家)에 있는 자는 앉아서 곧바로 보신불(報身佛)〮〮ㆍ화신불(化身佛)〮의 머리를 잘라내어야 비로소 얻는다."
학승이 물었다.
"보신불〮ㆍ화신불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자네의 경계는 아니야."
師示衆云 衲僧家 直須坐斷報化佛頭始得 問坐斷報化佛頭是什麽人 師云 非你境界
선가는 교가와 다르게 굳건한 믿음과 진심직설(眞心直說)로 곧바로 깨닫고 행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믿음은 '부처님의 교설과 역대 선지식'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억만겁 동안 변하지 않는 부처이다'라는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진심직설로 곧바로 깨닫고 행하는 것은 선사의 말한 마디를 듣고 즉석에서 '자신이 정말로 부처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곧 부처의 행을 행하면서 역대 선사가 그러했듯이 중생이 진심직설로 깨닫게 하는 방편을 내려주는 것이다.
위 조주 선사의 말이 바로 진심으로 하는 직설이다. "천상천하에 가장 위대한 부처는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잠들어 있다. 잠에서 깨어나려면 일체에 유혹되지 마라. 삼신불이라는 명칭도 버려라. 오직, 그대 자신이 가장 위대한 자이니 지금 여기서 즉시 모든 생각을 잘라내 버려라." 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지름길을 가르쳐 주면 즉시 깨어나서 중생의 습성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런데 이 설법을 듣고 "보신불ㆍ화신불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는 것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처를 회복하였다면 어찌 또 궁금함이 있으랴!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난 자라면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조주 선사를 흡족 시킬 수 있을까? 본 납자라면, "이 노인네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시득(始得) 운운하는 거야!"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겠다. 그대 납자들은 어떠한가?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대도는 바로 눈앞에 있다. 요컨대 그것을 보기 어려울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눈앞에 어떤 것이 있기에 학인에게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강남이건 강북이건 자네에게 맡기노라."
학승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어찌 사람을 위하여 방편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아까 무엇을 물은 것인가?"
師示衆云 大道只在目前 要且難睹 僧乃問 目前有何形段令學人睹 師云 任你江南江北 學云 和尙豈無方便爲人 師云 適來問什麽
눈은 창문이고 방안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다. 방안에 있는 사람을 보려면 방안의 사람이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때서야 밖에 있는 사람들은 방안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강남을 보건 강북을 보건 그것은 방안의 사람이 마음대로 보는 것이다.
밖을 내다보고 보이는 대로 선(禪)을 말하고 유일신(唯一神)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는 것은 좋다. 어떻게 되었건 그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것을 한번 알아보아라. 남에게 듣고 정의한 말을 믿지 말고 직접 들여다보라. 방안에 있는 자가 창문 밖을 내다보는 순간 세상사가 펼쳐진다. 그 순간 대도(大道)가 작동한 것이다. 밖을 내다보던 것을 거두어들이고 방안으로 들어가면 대도(大道)는 숨어버린다. 따라서 대도를 알려면 밖을 내다볼 때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도는 문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창문으로 내다보는 자(者), 내다보면 대도가 펼쳐지고 내다보지 않으면 대도는 거두어지는데, 분명 대도를 드러내고 거두어들이는 자가 있다. 그 자가 누구인가? 그자가 인류의 흥망을 한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
학승이 물었다.
"법계(法界)에 들어가면 그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누가 법계에 들어간 사람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법계에 들어가면 모르는 것이군요."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다 식어빠진 재(灰)더미이거나 죽은 나무와 같지는 않아. 백가지 현란한 꽃을 나타내는 거야."
학승이 말하였다.
"법계에 들어가면 용(用)아님이 없군요."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런 것과 상관없어."
問 入法界來還知有也無 師云 誰入法界 學云 與麽卽立法界不知去也 師云 不示寒灰死木 花錦成現百種有 學云 莫是入法界處用也無 師云 有什麽交涉
여기서 법계는 '진리의 세계'를 말한다. 법계에 들어간 사람은 진리를 깨달은 성현(聖賢)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이다. 그 사람은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며 처세가 다르다. 마음 깊은 곳에 번뇌가 없고 양변에 집착이 없으며 말끔한 가을 하늘처럼 마음이 언제나 청청(淸淸)하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알아도 아는 것이 없다한다.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도 들어간 지도 모른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겸손하다. 남에게 아는 것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의 일에 충실할 뿐, 시골의 밭가는 농부처럼 욕심도 없고 무엇을 강제로 이루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웃이 어려움이 빠졌을 때는 적극적으로 구하려는 활동을 하지만 구하였어도 누구를 구하였다는 말이나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의 세계에 이른 사람이 마치 다 식어빠진 재(灰)더미 같거나 죽은 고목과 같은 삶을 사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삶을 누구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살아 갈수도 있고,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성 있는 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 혹은 석가모니처럼 많은 사람을 제도하는 화려한 스승의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어둔하고 글이 어둡고 밑천이 얕다면 그런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아주 평범한 삶을 즐기면서 살아 갈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인공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므로 법계에 들어간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라는 정해진 것은 없다. 만물이 제각각의 빛을 내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듯이 성현(聖賢)도 제각각의 빛을 내기 때문에 법계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또 용(用)이라고 단정하지도 마라. 그러면 도(道)는 즉시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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