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30 (100915) 한 사람의 도인(道人) 찾기 힘들다

희명화 2015. 4. 8. 21:36



학승이 물었다.
“학인(學人)과 도(道)가 서로 보지 못할 때도 서로 통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짐작(測)으로 통하느니라.”
학승이 물었다.
“짐작하지 못해도 통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일 뿐이야.”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짐작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람을 바꾸어 가까이 가면 도는 더 멀어지는 법이야.”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어찌 스스로 숨으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지금 너와 대화하고 있잖아.”
학승이 물었다.
“어찌 바꾸지 말라고 말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래야 합당하기 때문이야.”

問 學人道 不相見時 還迵互也無 師云 測得迵互 學云 側他不得迵互箇什麽 師云 不與麽是你自己 學云 和尙還受測也無 師云 人卽轉近 道卽轉遠也 學云 和尙爲什麽自隱去 師云 我今現共你語話 學云 爭道不轉 師云 合與麽著

도(道)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다가갈 수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깨달아야 알 수 있다. 그런데 설사 누가 깨달아서 안다고 하여도 그것도 또한 어디까지나 짐작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도를 깨달은 사람들은 짐작은 물론이고 깨달음도 다 내다버린다. 그런데 도는 사람들이 도를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항상 사람과 통하여 있다. 사람이 말하는 것도 도이고, 걸어가는 것도 도이고, 일을 하는 것도 도이고, 책을 읽는 것도 도가 드러난 것이다. 설사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하여도 도가 드러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세상은 도 아님이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일상사가 곧 도인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도는 알려고 찾아다니고 얻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더 얻기 어렵다. 알려하고 얻으려하면 벌써 고요한 마음이 흔들린 것이고 그러면 사람의 본질이 바꾸어진 것이다. 그렇게 바꾸어진 마음으로 도를 알려하니 도가 나타날 리 없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야 한다. 마치 바깥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방안에 있는 그릇 속의 물은 고요하듯이 마음이 완전한 고요를 얻으면 그때 문득 내 마음이 도와 합치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조주 스님이 문하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교화할 수 있는 사람은 금생의 일이지만, 교화할 수 없는 사람은 3생의 원한(冤)이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고 교화하지 않으면 모든 중생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고, 교화한다고 하여도 역시 원한을 맺는 것이다. 도대체 그대들은 교화하겠는가, 말겠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교화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일체 중생이 그대를 볼 수 있겠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볼 수 없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왜 볼 수 없다는 것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무상(無相)이기 때문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지금 내가 보이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중생이 아닙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네 스스로 알아차려라."

師示衆云 敎化得底人 是今生事 敎化不得底人 是第三生冤 若不敎化 恐墮卻一切衆生 敎化亦是冤 是你還敎化也無 僧云 敎化 師云 一切衆生還見你也無 學云 不見 師云 爲什麽不見 學云 無相 師云 卽今還見老僧否 學云 和尙不是衆生 師云 自知罪過卽得


금생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전생의 업보가 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리 선(禪)을 말하고 도(道)를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다생의 업보가 크기 때문이다. 원래 업보가 중하면 정법을 멀리하는 법이다. 그런데 설하는 자와 듣는 자가 3생의 원한을 가진 사이라면 깨달음은 고사하고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학승이 "화상께서는 중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조주 스님이 보인다는 말이다. 조주 스님은 대담 말미에 "하물며 도를 닦는 너도 이 노승을 보는데 어찌 일체 중생이 너를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네 말대로 일체 중생이 너를 보지 못한다면 그들을 불국토로 인도하는 것이 되겠지만, 그들의 눈에 네가 보인다면 너는 그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 교화한다는 망발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그대가 또한 교화하지 않는다하여도 중생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자, 납자들이여! 중생을 교화하겠는가, 말겠는가? 만일 본 납자에게 묻는다면 "중생을 교화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겠다. 조주 스님이 "지금 내가 보이는가?" 하고 물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겠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이 납자가 이렇게 대답하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중생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알겠는가? 그대들이 '모른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본 납자의 과오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즉시 알 것이다.

스님이 문하 대중에서 설법하였다.
“8백 명이나 부처가 되려는 사람은 있어도 한 사람의 도인(道人) 찾기는 힘들다.”

師示衆云 八百箇作佛漢 覓一箇道人難得

8백 명이 아니라, 항하수 모래알만큼이나 되는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려고 수행한다하여도 절대 부처가 되지 못한다. 설사 천년을 다시 태어나 수행한다하여도 절대 성불(成佛)하지 못한다. 부처가 되려는 자는 불법을 잘못 안 것이다. 알겠는가? 이 말을 알아듣는 자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옛 스승들은 한결같이 말하였다. 지음자(知音者)를 만나기 어렵다고.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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