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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잠시 말이 없다가,
"대중은 다 모였는가?"
하고 물었다. 대중이 대답하였다.
"다 모였습니다."
"한 사람 더 오면 설법하겠다."
한 승이 말하였다.
"기다려도 올 사람이 없으니 곧 화상께서 설함이 좋을 듯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참으로 사람 얻기 힘들구나."
上堂良久 大衆總來也 未對云 總來也 師云 更待一人來卽說話 僧云 候無人來卽說似和尙 師云 大難得人
대중이 다 모였는데도 한 사람을 더 기다린다고 하였던 조주 스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여기서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당시 그렇게 모인 대중 말고 뭔가 특별한 사람을 기다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사가 상당하여 이렇게 말할 때는 당시 대중 중에서 누군가 이것을 알아채고 즉시 일어나서 그동안 공부한 견해를 한 번 밝혀보아야 한다. 조주 스님이 기다리는 사람은 눈 밝은 납자를 기다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대중 중에는 아무도 조주 스님의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던 듯하다. 오히려 이제 사람이 다 모였으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마시고 설법하심이 좋을 것 같다하였으니 조주 스님의 의도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조주 스님은 사람 얻기가 참 힘들다고 토로한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얻기가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주 스님이 대중이 모인 차에 말하였다.
"밝다고 하나 밝지 않고 어둡다고 하여도 밝아지려고 할 때이다. 그대는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학승이 말하였다.
"양쪽에 없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중간에 있는 것이로군."
학승이 말하였다.
"만일 중간에 있다면 양쪽에 있는 것이 됩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이 중은 나의 이곳에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지 이러한 말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삼구(三句)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빠져나온다 하여도 역시 삼구(三句) 속에 있는 것이야. 자, 자네 어떠한가?"
학승이 말하였다.
"저는 삼구(三句)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왜 빨리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師因參次云 明又未明 道昏欲曉 你在阿那頭 僧云 不在兩頭 師云 與麽卽在中間也 云 若在中間卽在兩頭 師云 這僧多少時在 老僧者裡 作與麽語話 不出得三句裡 然直饒出得也再三句裡 你作麽生 僧云 某甲使得三句 師云 何不早與麽道
삼구(三句)는 이쪽과 저쪽, 그리고 이쪽과 저쪽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것이 삼구(三句)이다. 즉 밝다하고 말한다면 일구(一句)에 떨어진 것이고, 어둡다고 말한다면 이구(二句)에 떨어진 것이다. 만일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삼구(三句)에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밝다고 할 수도 없고 어둡다고 할 수도 없고,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고도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하여 학인은 다만 때에 따라서 삼구를 사용할 뿐이라고 하였더니 조주 스님은 그때서야 비로소 학인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부처에 집착하면 일구에 떨어진 것이고, 중생계에 집착하여도 이구에 떨어진 것이니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부처와 중생을 다 떠났다고 하여도 역시 삼구에 떨어진 것이니 집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진리에 부합하는 삶의 자세는 부처와 중생계에 다 집착하지 않을뿐더러 이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것을 찾지도 않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부처임을 한 번 깨닫고 즉시 부처의 길을 가되 내가 부처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삼구(三句)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답은 오랜만에 조주 스님이 학인을 인정하는 문답으로 이루어져있다. 학인의 말이 옳다면 인정해주는 것도 선지식이 할 일 중에 하나이다. 선어록이 끝없이 부정으로만 채워진다면 이 선법(禪法)은 오해받기 쉽고 그런 법은 사라지기 쉽다.
학승이 물었다.
"시방을 관통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금강선(金剛禪)을 떠나는 것이야."
問 如何是通方 師云 離却金剛禪
방(方)은 각 방면을 뜻한다. 4방보다 세분할 때는 8방이라고 하고, 8방보다 세분하여 말할 때는 상방과 하방까지 합하여 10방이라고 말하는데, 편리한 발음을 위하여 시방(十方)이라고 부른다. 시방은 보통 우주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우주를 관통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사바세계 한 국토에 있는 것을 다 관통하였다고 하여도 대단한 일인데, 시방을 관통하였다면 가히 부처님과 같이 영웅 중에 영웅이 아니면 그리되기 힘들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우주를 관통하는 것에 대하여 간단히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즉, 금강선(金剛禪)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방을 관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금강선은 요지부동의 절대 선정을 얻은 것을 말한다. 만약 누가 한 번 앉으면 수 시간, 혹은 수일을 망상 없이 한 가지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다면 그는 정(定)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죽을 때까지 않아있다고 하여도 단 한 번의 망상도 없이 선정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을 금강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부동의 선정 상태는 모든 수행자들이 동경하는 경지이다. 생도 죽음도, 분노도, 미움도 없이 오로지 고요한 마음 하나만 가득하여 마음이 마치 고요한 허공과 같으면 일체를 벗어난 절대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 경지에 들어가도 이 절대 경지를 즐기고 있다면 이 또한 병(病)이 들은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있고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온갖 것을 겪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은 항상 고요해서 무엇을 보고 느껴도 고요해야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을 돌과 나무와 같은 마음이 됨을 즐거워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런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돌과 죽은 나무는 천지에 가득하다. 그것을 부처라고 떠받들면 되지, 무엇 때문에 죽을 고생하여 금강선을 닦는단 말인가. 금강선에 들어간 자는 금강선을 버려야 한다. 불교에 들어간 자는 불교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사통팔달 모르는 것이 없는 지혜를 마음대로 쓸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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