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24 (100728) 제3의 화살은 무엇일까?

희명화 2015. 4. 8. 21:33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정(定)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부정(不定)이야."
학승이 물었다.
"어찌해서 부정(不定)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살아있는 물건이야, 살아있는 물건."

問 如何是定 師云 不定 學云 爲什麽不定 師云 活物活物

정은 삼매를 말한다. 원래 정(定)자는 '고정된다', '정해졌다'라는 의미이다. 정신이 하나에 고정되어있어서 다른 것이 침범할 틈이 없는 것이 '정'이다.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선지식은 한결같이 선정을 닦을 것을 강조하였다. 선정삼매는 전생의 습기를 녹이고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정하지 않는 것이 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주 스님은 정에 대한 입장을 본질적 측면을 들어서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분히 선적이다. 즉, 자성은 본래 형체가 없어서 항상 정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원래부터 삼매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따로 정에 들어가는 수행은 필요 없고 오로지 살아있는 물건답게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정이라는 것이다.

정을 닦는 것은 좋으나, 행여 일평생 움직이지 않고 정에 들어가 있는 것이 최상의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오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고 일하므로 써 스스로 존재가치가 빛난다. 그런데 정에 들어가 죽은 자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기만 한다면 도대체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그런 멸진정(滅盡定)은 바람직스럽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강하게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조주 스님은 육조 스님의 뜻과도 부합한다. 즉, 육조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하다는 모양을 내세워 이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자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는 것이니라."라고 말하여 정에 빠져 있는 자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모든 것에 따라다니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합당한 거야."
학승이 말하였다.
"그것이 학인의 본분사였군요."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 봐. 벌써 따라붙었잖아, 따라붙었어."

問 不隨諸有時如何 師云 合與麽 學云 莫便是學人本分事 師云 隨也隨也


학인의 본분사는 언제나 항상 수행하는 자세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습기는 다겁을 윤회하면서 쌓아온 결과이기 때문에 1∼2십년 수행으로 깨끗한 불성과 같은 행동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이 수행은 한번 깨닫고 평생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 바른 수행의 길이다.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일체에 유혹되지 않는 것이다. 세간의 모든 개념은 하나의 헛된 주장이고, 생각이고, 약속이다. 그런 것이 절대 진실일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런 허망한 개념 어떤 것에고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셨다하여도 마음이 동요될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할 뿐, 마음은 고요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본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체에 유혹되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조주 스님을 방문하였던 학인도 그러한 수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조주 스님께 점검 부탁 차 질문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도 '일체에 따라가지 않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긍정해주었다. 그러자, 학인이 "네, 그렇군요. 그것이 학인의 본분사임을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하자, 조주 스님은 직하에서 예리하게 지적해주었다. "그것 봐, 자네는 지금 '그것이 학인의 본분사'라고 단정하고 있잖아, 그렇게 되면 그것이 곧 따라간 것이 아니고 뭐겠어. 매사 조심해야 돼."라는 점검을 내려준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옛 사람은 30년간 하나의 활과 두 개의 화살로써 단지 반 개(半箇)의 성인(聖人) 밖에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온전히 쏴 주시기 바랍니다."
조주 스님은 불쑥 일어나 나가버렸다.

問 古人三十年一張弓兩下箭 只射得半箇聖人 今日請師全射 師便起去

<벽암록> 81칙 평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삼평 스님이 처음에 석공 화상에게 갔다. 삼평이 거의 다 다가오는 것을 본 석공은 곧 활을 쏘아댈 자세를 취하면서 말하였다.
"화살 보아라."
그러자 삼평은 가슴을 활짝 열어놓고
"살인(殺人) 화살입니까, 활인(活人) 화살입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석공은 곧 활줄을 세 번 퉁겼고, 삼평은 곧 예배하였다. 석공이 말하길, "30년 동안 활 하나와 두 개의 화살로 오늘에야 비로소 겨우 반 개의 성인을 쏠 수 있었군."
하고 활과 화살을 꺾어버렸다.

이 고사에서 석공 스님은 오랜만에 삼평 스님과 같은 걸출한 선객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석공 스님은 삼평 스님을 성인(聖人)이라고까지 추켜세워 말한 것만 보아도 삼평 스님을 매우 유망하게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석공 스님이 자신의 선적 가르침을 다만 반 개의 성인을 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삼평 스님의 자질은 원래부터 부처이고 부처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온전히 다 적중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석공 스님은 다만 활줄 3번의 퉁김을 통하여 삼평의 잠자고 있던 일부분을 깨웠을 뿐이다. 그래서 반 개를 맞혔다고 말한 것이다.

석공 스님이 세 번 활줄을 퉁긴 것은 우선 삼평 스님이이 다른 납자와 다르게 가슴을 활짝 내밀고 그 화살이 살인 화살인가, 활인 화살인가 묻는 것부터 심상치 않는 기백이 있음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석공은 저런 자라면 한번 화살을 날려 볼만 하겠구나하고 내심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세 번의 활줄 퉁김은 선악, 빈부, 중생과 부처, 늘어남과 줄어듦, 생과 사 등의 양변을 떠난 제 3의 화살을 날린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삼평이 '제 3의 뜻'을 알아채고 즉시 예배를 하였으므로 석공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한 것이다. 30년을 기다려도 이렇게 즉시 알아듣는 인재를 만나지 못하였는데, 비로소 인재를 만났으니 석공 스님은 할 일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 활과 화살을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학인이 위의 고사에 나오는 석공 화상의 이야기를 들면서 "석공 화상은 30년간 단지 반개의 성인을 쏘았을 뿐이지만, 화상께서는 지금 온전히 적중시켜주십시오." 하고 조주의 선적 가르침을 구한 것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불쑥 일어나 나가버린 것이다. 어떠한 미련도, 어떠한 여지도,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고 불쑥 나가버린 것 자체야 말로 일체를 쓸어버린 온전한 적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선적 행위는 즉석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주 스님은 노련한 노승이므로 학인에게 이렇게 명쾌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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