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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문하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도(道)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하는 것을 꺼릴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벌써 간택한 것이기도 하고 명백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승은 도는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자네들은 도리어 그것(道)을 아끼고 보호하려 하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하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중요시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나도 몰라."
학승이 말하였다.
"화상께서 이미 모른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질문은 그것으로 됐어. 예배하고 물러가라."
師示衆云 至道無難 唯嫌揀擇 纔有言語 是揀擇是明白 老僧卻不在明白裡 是你還護惜也無 問和尙旣不在明白裡 又護惜箇什麽 師云 我亦不知 學云 和尙旣不知 爲什麽道不在明白裡 師云 問事卽得 禮拜了退
도(道)에 들어가려면 우선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간택은 대개 양변을 간택한다. 선과 악, 부처와 중생, 잘난 자와 못난 자, 부와 가난, 좋은 것과 싫은 것 등의 양변의 세계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이 양변을 선택하는 마음을 끊지 못한다면 도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있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도 하나의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도(道)는 너무 명백하다. 도는 없는 곳이 없고 도가 나타나지 않는 곳도 없다. 그러나 도가 명백하지만 도를 선명하게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여도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 그래서 도는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도가 명백한 곳에도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을 중요시 하는 것은 없다. 조주 스님은 다만 학인들이 집착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 되든 지 갖다 버리라고 가르칠 뿐이다. 조주 스님은 도를 모르지만 도를 보여주고 일러주는 것을 능숙하게 한다. 따라서 조주의 '모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연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려해서는 안 된다.
선사를 압도하는 방법은 2단계 3단계 높은 것을 들이대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주 스님의 '모른다'는 말끝에 무슨 말을 하여야 조주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한 번 궁리해 보길 바란다. 만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주 스님의 연패(戀佩)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서 설법하였다.
"'법은 본래 불생(不生)이며, 지금도 무멸(無滅)이다. 따라서 생이라고 말하거나 멸이라고도 말하지 말라.' 라는 따위의 말도 필요 없다. 여러분은 자, 생각해보라. 불생불멸의 도리가 어떠한가?"
학승이 말하였다.
"그것이 벌써 불생불멸의 도리 아닙니까? "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이 자는 그저 하나의 죽은 말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군. "
師示衆云 法本不生 今卽無滅 更不要道 纔語是生 不語是滅 諸人且作麽生 是不生不滅底道理 問 早是不生不滅 師云 者漢只認得箇死語
본래 생이 없기 때문에 멸도 없다는 것이 불생불멸의 뜻이다. 불생불멸 이 한 글귀는 참으로 많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한번 진리에 눈이 뜨이면 일평생 편안해짐을 얻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조주 스님 역시 불생불멸의 뜻을 설명해주면서 참다운 불생불멸은 불생불멸이라는 말도 필요 없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대중들에게 "그대들은 불생불멸의 도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한 학승이 "스님께서 이제껏 설명하신 것이 곧 불생불멸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반문성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진실을 표현한다면 도는 결국 말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도를 찾는 자들은 항상 진솔하게, 그리고 보다 입체적으로, 혹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 예전 선사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그런 예인데, 다만 죽은 말을 외우고 다녀서는 남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납자들이여, 어떻게 하여야 불생불멸의 도리를 제대로 이르는 것이 되겠는가? 한 번 궁리해 볼 일이다. 만일 이 납자에게 누가 묻는다면 "창천(蒼天), 창천(蒼天)!"하고 이르겠다.
학승이 물었다.
"'도(道)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하는 것을 꺼릴 뿐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한다면 벌써 간택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십니까? "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옛 사람의 말을 전부 인용하지 않는가?"
학인이 말하였다.
"저는 다만 그 말 그대로 말하였을 뿐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야."
問 至道無難唯嫌揀擇 纔有言語是揀擇 和尙如何示人 師云 何不盡引古人語 學云 某甲只道得到這裡 師云 只這至道無難唯嫌揀擇
사람은 평생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선택한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다. 명예, 욕망, 분노, 사랑 등은 모두 사람들이 세워놓은 허망한 가치들이다. 그 허망한 가치를 쫓아 일평생 살아가고 있으니 인생이 한편의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성인들은 무엇이든 선택하지 말라 하였다. 인생이 꿈속의 삶이라 행위는 선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엇이 낫다 못하다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道)는 정신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 되던 그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평생 어떠한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도이다. 그중에 승찬 스님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간택하지 말라고 말한 것도 간택이 되니 그런 말도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선사들이 도대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까. 이 또한 학인들의 궁금증이 될 만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조주 스님은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 그대로 전달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만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중요한 것은 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진실이나 사랑 같은 것도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이 다르고 말의 힘이 다르고 마음 씀씀이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다. 이러한 것을 보고 사랑을 판별할 수 있듯이, 도를 얻은 자도 선배 도학자(道學者)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도를 얻으면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 어떤 말을 하여도 도와 부합된다. 그것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선배만 할 수 있는 일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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