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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방계(傍系)를 계승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누구인가?”
“혜연(惠延)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무엇을 물은 것인가?”
학승이 대답하였다.
“방계를 계승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주 스님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問 不紹傍來者如何 師云 誰 學云 惠延 師云 問什麽 學云 不紹傍來者 師以手撫之
적자(嫡子)는 부처님 대를 이을 사람이다. 선문(禪門)에서 중생은 모두 부처의 적자이다. 즉, 중생은 모두 부처의 직계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부처로 태어난다. 적자는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부처의 길을 가면 된다.
방계는 스스로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면서 온갖 수행을 한다. 혹은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복록을 쌓기도 하고, 혹은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얻기 위하여 십여 년 이상을 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수행한다. 그런데 정통 선문은 이렇게 불철주야 수행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역설한다. 수행해서 부처를 이루려는 것은 자기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 것과 같고, 자기 손바닥을 남의 손바닥에서 찾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문 안에서는 오로지 장부의 기개를 가지고 즉시 적자의 행로를 가는 것만 필요하다. 그렇게 가는 사람이 있으면 조주 선사를 비롯하여 역대 선사들은 그를 보고 “선재, 선재로구나.”하면서 쓰다듬어 줄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가사 밑의 일(事)이란 어떤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
問 如何是衲依下事 師云 莫自瞞
불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그것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잘라 말하고 있다. 불자들은 매일 자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부처의 적자가 되어 지금 자기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 부귀와 욕망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이 맞는가? 옷만 바꾸어 입고 정신은 출가자가 아닌 세인의 정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 빨리 도를 깨달아 세인들을 지도하고 계몽하여야할 사람이 감투를 얻기 위하여 아부하고 돈을 뿌리는 세인들의 저속한 행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구 6물로 만족하고, 항상 겸손하고, 소박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온갖 호사스러움을 즐기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청정한 척하는 것은 아닌지, 거듭 거듭 살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 자기 자신만은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학승이 물었다.
“진여(眞如)나 범성(凡聖)은 다 잠꼬대와 같은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한 말(眞言)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다시는 두 가지(兩箇)를 말하지 않는 거야.”
학승이 물었다.
“두 가지는 놔두고 진실한 말은 무엇입니까?”
조주가 말하였다.
“옴 부리발.”
問 眞如凡聖皆是夢言 如何時眞言 師云 更不道者兩箇 學云 兩箇且置 如何是眞言 師云 唵口部口林口發
진여는 참다운 정신세계이고 차별이 없는 저 언덕을 말한다. 범성(凡夫ㆍ聖人)은 아직 사량 분별이 남아있는 이 언덕이고 차별이 있는 현상계이다. 그러나 참다운 경지에서는 진여라고 말하여도 틀리고 범성이라고 말하여도 틀리다. 모두 꿈속에서 떠드는 것과 같이 헛된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한 말인가?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옴 부리발’하면서 사원에서 외우는 진언 비슷한 발음을 내었다. 사실 경서에 ‘옴 부리발’이라는 진언은 없다. 조주 스님이 창안하여 낸 발음이다. 조주 스님이 선적인 대답을 해준 것이다. 조주 스님의 이 진언은 선사들의 할이나, 격외구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주 스님의 진언의 뜻은 무엇일까? 혹, 자연에서 나는 소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휘익-’하는 바람 소리나, 새들이 지저귀는 ‘지지배배’ 같은 발음들이나, 지하철이 바퀴가 글러가는 ‘철부덕 철부덕’ 하는 소리 말이다. 그렇다. 이 소리들이야 말로 온갖 사량 분별을 벗어나고 이쪽과 저쪽을 뛰어넘은 참된 소리가 아닐까.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조주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동문ㆍ서문ㆍ남문ㆍ북문이야.”
問如何是趙州 師云 東門西門南門北門
조주(趙州)는 중국의 고대의 한 지명이다. 조주 스님은 원래 종심(從諗)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이 80세가 넘어서 조주 관음원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120세까지 40년간 조주에 살았기 때문에 지명이 법호가 되었다.
여기서 학승은 조주의 본질에 대하여, 혹은 조주의 그릇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이것은 학승이 큰 스님께 큰 스님 자신에 대한 평을 부탁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주 스님도 그 의중을 알아차리고 자기를 조주라는 지명에 있는 문이라고 빗대어 소개하였다.
조주 자신은 조주의 땅으로 들어가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주? 조주의 본질은 비었다. 조주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저 언덕이다. 나는 평생 무엇을 주장하거나 가지고 있은 적이 없다. 다만 나는 조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누구든지 조주로 들어가려면 4대문을 거쳐야 하듯이, 나 조주를 찾아온 사람은 조주의 말과 조주의 생각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주의 본색이 아닌 조주 땅을 밟기 전 초입에 있는 문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그 누구도 조주를 알 수는 없다. 조주에 가려면 4대문 초입에 있는 문을 지나가야 하듯이 겉에서 조주의 안내(교화)를 받는 것이다. 진정한 조주는 보이지 않는다. 조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어떤 선사도,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라.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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