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21 (100719) 나의 가르침은 보기는 쉽다

희명화 2015. 4. 8. 21:32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내가 이곳에서 가르치는 불법은 말하기는 어려우나 쉽고, 말하기는 쉬우나 어렵다. 다른 곳은 보기는 어려워도 알기는 쉽지만 나의 가르침은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만일 알 수만 있다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을 것이다.”

師示衆云 此間佛法 道難卽易 道易卽難 別處難見易識 老僧者裡卽易見難識 若能會得 天下橫行

조주 스님의 회상뿐만 아니라, 진정한 선사가 있는 곳이라면 가르치는 불법이 때로는 쉽지만 때로는 어렵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자성(自性)을 보는 것을 말하는데 즉, 견성(見性)이다. 원래 제대로 된 선지식을 만나면 견성하기는 쉬운 법이다. 그러나 본 것을 말로 하라하면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불법은 말하기는 어려워도 쉬운 것이고, 혹 말하기 쉽다하여도 그것을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늘상 말하고 있다. “내 법은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고.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견성도 하고 또한 자성에 대한 견해도 확실히 얻었다면 천하에 그 누구도 이 사람은 어떻게 해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견성은 쉽다. 그러나 확신을 얻기는 힘들고, 또 견성한 것을 남들에게 알리기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만일 견성과 동시에 말문까지 트였다면 불법은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홀연히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가?’하고 물었을 때 만일 조주에서 왔다고 한다면 조주를 비방한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조주에서 오지 않았다’하여도 또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된다. 자, 여러분이라면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학승이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비방하는 것이 된다면 화상께서는 어떻게 비방하지 않으시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만일 비방하지 않고 이른다하여도 벌써 비방한 것이다.”

忽有人問 什麽處來 若向伊道 從趙州來 又謗趙州 若道不從趙州來 又埋沒自己 諸人且作麽生對他 僧問 觸目是謗 和尙如何得不謗去 師云 若道不謗 早是謗了也

이 대담도 금강경의 사상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만일 불법을 불법이라 하고 또 부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부처를 비방한 것이다. 선(禪)을 닦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주의 제자가 되어서 조주가 있다하고 조주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승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조주의 제자가 되어서 조주 스님의 제자라 밝히지 못하고 조주의 선법을 말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때를 당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설사 비방하지 않고 이른다하여도 이미 비방한 것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천하의 납자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서는 단숨에 우주를 박차고 벗어나는 장부의 기개가 필요할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바른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수행해야함을 알면 된 거야. 만일 수행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갖가지 인과 속에 떨어질 거야.”

問 如何是正修行路 師云 亥修行卽得 若不解修行 卽參差落他因果裡


무엇이 바른 수행인가? 다만 수행이 필요함을 알면 된 것이다. 불자라면 수행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수행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마음은 오랜 동안 탐진치 삼독이 한 겹 한 겹 달라붙어 억천만겹의 집착 덩어리로 습관화된 상태이다. 때문에 자기를 비우는 수행을 하지 않고 어느 한 순간 마음이 깨끗해지길 바라는 것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같다.

오늘날 강의를 한다, 소임을 산다, 봉사를 한다, 포교를 한다라는 명목으로 입으로만 부처를 말하고 실제 부처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 번 되새겨볼 말이다.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간단하다. 부처행을 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세월만 보낸다면 조만간 인과 속에 떨어져 쓴맛을 한 번 본다는 말이다.

또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자네들에게 할 말을 가르쳐주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조주에서 왔다’라고. 만일 ‘조주는 어떤 법을 설하는가’하고 물으면 다만 이르라. ‘추우면 춥다하고 더우면 덥다 한다’라고. 만일 다시 이르기를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야’ 하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물은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라. 만약 재차 ‘조주는 어떤 법을 설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곧 대답하라. ‘제가 올 때 노스님께서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상좌께서 만약 조주의 일을 알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십시오.’라고.”

又云 我敎你道 若有問時 但向伊道 趙州來 忽問趙州說什麽法 但向伊道 寒卽言寒 熱卽言熱 若更問道 不問者箇事 但云 問什麽事 若再問趙州說什麽法 便向伊道 和尙來時不交傳語 上座若要知趙州事 但自去問取

조주 스님의 법은 별 달리 어려울 것도 없고 어떤 깊은 단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주 스님은 다만 ‘추우면 춥다하고 더우면 덥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주 스님 스스로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 특별함은 없다는 말뜻이다.

조주 스님은 정도를 걸어가는 사람이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항상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다. 공연히 각종 미사려구나 온갖 사상을 들이대면서 진리를 치장하거나 어렵게 포장하지 않는다. 도는 어렵지 않다. 도를 실천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도를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도를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추우면 춥다하고 더우면 덥다 하면 된다. 사람들이 도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도의 실체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학승이 물었다.
“앞뒤를 돌아보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놔두고, 그대는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問 不顧前後時如何 師云 不顧前後且置 你問何誰

이 문답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혹 도(道)를 닦는 사람이 어디서 도에 대한 견해를 좀 듣고는 도는 고하가 없고 형체가 없으며 전후도 없다고 생각하여 막행막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도의 근원으로 돌아가 말한다면 지위고하가 없고 형체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의 세계는 도가 근원에서 흘러나와 갖가지 차별을 이룬 세계이다. 그러므로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현실이고,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차별을 인정한 속에서 평등심을 가져야 한다.

일체 중생이 부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스스로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사원의 조실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것이고, 이 계통의 선배가 있고 후배가 있으며, 중생을 이끌어야할 선지식이 따로 있고 선지식을 찾아가서 예배와 예의를 갖추어 묻는 자가 있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전후가 없다는 것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나중에 따지고 너는 지금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물으므로 써 명백한 차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즉, “너는 전후가 없다하지만 현실에서 어찌 없을 수 있겠느냐, 당장 네가 나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을 보아라. 분명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따로 있지 않느냐?” 라는 의미의 반문성 가르침이다. 납자들이 새겨들어야할 대담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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