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19 (100627) 옛 거울

희명화 2015. 4. 8. 21:32



학승이 물었다.
"옛 거울은 닦지 않아도 비춥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전생은 인(因)이고 금생은 과(果)야."

問 古鏡不磨還照也無 師云 前生是因 今生是果

선사들의 대답은 항상 짧고 간단하다. 전후의 설명은 생략하고 본질만 드러내기 때문에 좀처럼 그 진의를 다 파악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옛 거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옛 거울은 사람의 근본 심성(心性)을 말한다. 심성은 우주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였기 때문에 아주 오래되었다. 사실 심성은 있다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옛 거울에 비유한다면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원인이 있다면 반드시 결과가 있는 법이니까.

조주 스님은 심성을 옛 거울에 비유한다면 그것이 존재의 원인이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옛 거울은 원래부터 닦지 않아도 밝다는 말이다. 그것은 원래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학승이 물었다.
"세 개의 칼(三刀)이 떨어지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빽빽하다."
학승이 물었다.
"떨어진 후에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밝고 밝다."

問 三刀未落時如何 師云 森森地 云 落後如何 師云 逈逈地

여기서 세 개의 칼(三刀)은 탐진치 삼독(三毒)을 말한 것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자기 살을 도려내는 예리한 칼과 같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칼을 차고 있으면 인생은 복잡해진다. 마치 분노, 복수, 시기, 질투, 미움, 성공, 실패 등의 갖가지 난삽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탐진치 삼독의 증세가 얼마나 가셔졌는지 그것을 자주 살펴보아야 한다. 설사 탐진치 삼독이 완전히 끊어졌다하여도 도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삼독이 끊고, 끊어졌다는 생각까지 마음에서 일어서지 않아도 또한 도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직 탐진치 삼독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도와는 더욱 요원할 뿐이다.

그런데 본래 사람의 마음은 삼독이 아무리 침범하려고 하여도 절대 침범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원래 삼독에 중독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습관적으로 삼독심이 일어날 뿐이다. 그러므로 습관을 제거하면 삼독에서 벗어난다. 따로 삼독을 벗어나는 고난도의 수행은 필요 없다.

학승이 물었다.
"삼계(三界)를 벗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가두어 둘 수 없어."

問 如何是出三界底人 師云 籠罩不得


삼계(三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이다. 욕계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세계이고, 색계는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살아가는 세계이고, 무색계는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마음의 주의 주장이 남아있는 세계이다. 삼계는 윤회하는 중생계이다. 도를 이루면 삼계에서 벗어난다. 즉, 욕망, 집착, 주장을 벗어나는 것이다.

삼계를 벗어난 사람은 그 어떤 말로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고, 그 어떤 욕설이나 감언이설로도 그를 유혹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사상으로도 그를 얽어맬 수 없다.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말한 마디에 마음속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은 아직 대자유를 얻은 사람이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우두(牛頭) 법융(法融) 선사가 아직 4조 도신 선사를 친견하지 않았을 때에는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을 드렸는데, 친견하고 난 후에는 어찌하여 백 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드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세간에 응하는 것과 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

問 牛頭未見四祖 百鳥銜花供養 見後爲什麽百鳥不銜花供養 師云 應世不應世


우두 법융 스님은 출가하여 49세가 되자 건강 우둔산 유서사(幽棲寺) 북쪽 바위 아래에 선실(禪室)을 짓고 살았다. 이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을 보고 갖가지 새들이 꽃을 물고 와서 공양을 올렸으므로 사방에 꽂이 쌓여있었다. 하루는 4조 도신 스님이 와서 법 일러줌을 받고 심요(心要)를 깨달았다. 이로부터 사방의 도속(道俗)들이 몰려와 교화를 받게 되니 문인이 100인이 넘었다.

그런데 도신 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이상하게 새들이 꽃을 물고 오지 않았다. 법융 스님은 64세(652)에 건초사(建初寺)에서 죽었다. 후에 법융의 선은 우두선(牛頭禪)이라 하여 크게 흥성하였다.

마음에 신비로움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고, 고고한 수행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으면 아직 때가 뭍은 것이다. 즉, 옳고 그른 것이 끊어지지 않은 유심(有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하여도 신선과 같은 경지는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새들도 그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고 갖가지 꽃을 물고와 공양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선사의 법문을 듣고 한번 깨달아 마음에서 시비심이 끊어지고 평등심이 회복되면 마음은 투명하여 마치 허공과 같이 말끔하게 된다. 그러면 새들은 절대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대저 선사의 마음은 항상 무심(無心)이어서 귀신도 알아채지 못하는데 어찌 한낱 미물인 새들이 선사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러하니 꽃이 쌓이지 않는 것이다. 꽃이 없고 공양물이 없는 것은 그 선사의 마음이 그만큼 말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http://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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