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령스러움이란 무엇인가?
학승이 물었다.
“노지(露地)의 흰 소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달빛 아래에서 색은 무용지물이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을 먹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씹는 것이 없어.”
학승이 말하였다.
“제발 스님께서 대답해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노승은 응당 이럴 뿐이야.”
問 如何是露地白牛 師云 月下不用色 云 食噉何物 師云 古今嚼不著 云 請師答話 師云 老僧合與麽
길 위에 흰 소는 심우도에 나오는 소인데 검은 소는 중생의 습성이 많이 배여 있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고, 흰 소는 중생의 습성이 사라져서 깨끗한 마음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흰 소는 부처의 심성을 회복한 청정한 상태이다.
학승은 길 위에 흰 소에 대하여 조주 스님의 선적 견해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의 대답은 시큰둥하다. 검은 소든지 흰 소든지 달빛 아래 서있으면 모두 흰 소가 된다. 따라서 소가 가지고 있는 색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조주 스님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흰 소?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하다고… 원래 모두 흰 소야.”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신수종인 북종선에서는 닦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혜능종인 남종에서는 닦음은 중요하지 않고 깨달음을 중시한다. 중생은 원래 부처이다.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선사의 말을 듣고 사람이 깨달으면 그 순간 중생의 무명(無明)은 거두어지고 밝은 상태가 된다. 검고 어두운 것은 무지(無知)한 상태이다. 사람이 깨달아 알면 무지는 즉시 사라지고 밝음만 남는다는 것이 남종의 선법인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흰 소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그 소는 형체가 없어서 무엇을 먹거나 씹지도 않는다. 닳아서 줄어들 것이 없고 자라날 것도 없다. 그런데 무슨 색깔이 있겠는가. 공연히 분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흰 색과 검은 색을 갈라놓는 것이다. 마음 그 바탕은 성인이나 중생이나 똑같다. 모두 한결같이 깨끗하다. 그래서 중생이 부처인 것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마음으로 무언가 헤아리려하면 어긋나 버린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세 번 치고 말하였다.
“노승이 그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師示衆云 擬心卽差 僧便問 不擬心時如何 師打三下 云莫是老僧辜負闍黎麽
이 법은 조금도 의심 없이 그대로 들어와야 한다. 도(道)에 대하여 약간의 망설임이나 의심이 있게 되면 그 의심 자체가 도와 멀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래서 옛부터 선사들은 헤아리지 말라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조주 스님도 마찬가지로 설법하고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선사가 방금 헤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알아듣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금방 헤아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어떤 스님도 ‘헤아리지 않는 상태는 어떠합니까?' 하고 헤아리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주장자로 3번이나 두들겨 주었다. 그러면서 조주 스님은 법에 대한 가르침은 정확하고 엄격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 설명은 “주장자로 너를 때리는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대를 위하여 이러는 것이다. 먼 훗날 네가 도에 대하여 알게 되면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다. 도에 대하여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헤아리면 안 된다. 도는 헤아리면 절대 알지 못한다. 선사가 한 마디 했을 때 전심으로 받아들이고 바로 행하면 비로소 도에 들어갈 자질이 되는 것이다. 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진실(眞實)’이라는 과제 하나만 하여도 그렇다. 무엇이 진실인가? 3아승지겁을 찾아다녀 보라. 과연 그대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무릇 문답이라는 것은 뜻(意)에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뜻에 떨어지지 않고 스님은 어떻게 응대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 물어 보아라.”
학승이 말하였다.
“청컨대 스님께서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이 속에서는 옳다 그르다 하지 마라.”
問 凡有問答落在意根 不落意根師如何對 師云 問 學云 便請師道 師云 莫向者裡是非
선(禪)을 말하고 도(道)를 말할 때 절대 뜻에 떨어지면 안 된다. 선과 도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불법을 불법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만약 불법을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벌써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로 대담에는 어떤 뜻을 포함하게 되어있으므로 대개 뜻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조주 스님과 같은 선사들은 어떻게 뜻에 떨어지지 않고 선을 보일 수 있을까? 학승은 이것이 궁금하여 질문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천만번 설명하여서는 안 될 일이고 네가 직접 한번 나에게 물어 보라고 하면서 현장 설법을 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마침 조주 스님의 선기를 볼 기회였는데 학승은 딱히 질문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그냥 설명하여 달라고 재청하였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여기서는 옳다 그르다 하지 말라”하고 원론적인 말만 하고 마친 것이다.
오랜만에 조주 스님의 선기를 엿볼 기회였는데 실제 응답이 없어서 안타깝게 되었다. 그런데 조주 스님의 뜻에 떨어지지 않는 답변은 본 <조주록>에 여러 번 나오고 있으므로 그리 실망할 일은 아니다. 독자들은 각자 존경하는 선사를 찾아가서 '뜻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를 한번 물어보길 바란다. 그 답변이 조주 스님과 어떻게 다른가 한번 비교하여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용녀(龍女)가 부처님께 친히 바쳤다고 하는데 무엇을 바친 것입니까?”
조주 스님은 두 손으로 바치는 자세를 취하였다.
問 龍女親獻佛 未審將什麽獻 師以兩手作獻勢
용녀헌공(龍女獻供)은 <법화경>「제바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용왕의 여덟 살 난 딸은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보주(寶珠)를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이것을 기꺼이 받으시었고 용녀는 즉시 성불하였다.
용녀가 보주를 공양 올리고 성불한 것은 보주를 올리고 성불한 것이 절대 아니다. 보주를 올리고 성불하였다면 수많은 불사를 하였던 양나라 무제도 즉시 성불하여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지 않은가. 용녀가 성불한 것은 부처님께 믿음을 바친 것이다. 믿음은 도에 들어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런데 용녀가 올린 보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받들어 올린 빈 양 손이다. 알겠는가?
無不禪院 院長 石雨
http://cafe.daum.net/mubulsun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