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18 (100620) 부처는 누굴 위해 번뇌합니까?

희명화 2015. 4. 8. 21:31



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이 일은 명주(明珠)가 손바닥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야만인(胡人)이 오면 야만인이 나타나고 한인(漢人)이 오면 한인이 나타난다. 노승은 한 가닥의 풀(草)을 가지고 1장 6척의 황금신(黃金身)을 만들어 쓸 수 있고 1장 6척의 황금신을 가지고 한 가닥의 풀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 부처가 곧 번뇌이고 번뇌가 곧 부처이다."

師上堂云 此事如明珠在掌 胡來胡現 漢來漢現 老僧把一支草 作丈六金身用 把丈六金身 作一支草用 佛卽是煩惱 煩惱卽是佛

이 일이란 '깨달음을 얻어서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을 말한다. 일단 도(道)의 심층부를 한번 깨달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명주를 굴리는 것과 같아서 능수능란한 귀재가 된다. 따라서 거친 사람이 오면 거친 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고귀한 사람이 오면 고귀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 버려서 모두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선사는 만일 선(禪)에 대한 견해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온다고 하여도 척 하고 한마디 들어보면 그가 어느 경지에 있는지 금방 알아버린다. 따라서 사람과 대담하는데 별스럽지 않는 풀 하나를 가지고도 상대의 폐부를 찌를 수 있는 무기로 둔갑시켜 혼절 시킬 수 있고, 혹은 귀한 보도(寶刀)와 같이 뛰어난 문장도 한 낱 휴지처럼 구개에 내다버리므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에 자유롭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이 일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한 마디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사람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훤히 알아버린다.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능력은 누구나 개개인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중생은 그 재능이 묻혀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지 않다. 차별은 없고 평등만 존재한다.

학승이 물었다.
"부처는 누구를 위하여 번뇌합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번뇌한다."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면할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면하여 뭘 하겠는가?"

問 佛與誰人爲煩惱 師云 與一切人爲煩惱 云 如何勉得 師云 用免作麽

부처가 번뇌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고 돌이나 나무일 것이다. 부처도 일체 중생을 위하여 번뇌한다. 선사가 번뇌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고 돌이나 나무일 것이다. 불법은 사람을 무정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처나 선사가 번뇌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부처라면 환경 문제에 대하여 뜻있는 사람과 함께 고민할 것이고, 진정한 선사(禪師)라면 지구촌의 이상 기온에 대하여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번뇌할 것이다. 불법은 지구 위에 있는 뭇 생명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 위한 진리를 설한 것이다.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는 종교로서 별 의미가 없다. 그런 종교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장차 보통 사람과 함께 끝까지 호흡하면서 인간과 환경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는 종교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다.

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노승은 이곳에서 본분사(本分事)로서 학인을 지도한다. 만약 노승보고 그들의 근기에 맞게 지도하라 한다면 3승 12분교로써 지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뒤에 솜씨 좋은 한 선지식을 만난다면 노승이 그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본분사로서 그를 지도할 뿐이다."

師示衆云 老僧此間 卽以本分事接人 若敎老僧隨伊根機接人 自有三乘十二分敎 接他了也 若是不會 是誰過歟 已後遇著作家漢也道 老僧不辜他 但有人間 以本分事接人

선사는 항상 본분사로서 사람을 지도한다. 본분사라는 것은 사람의 근본과 우주의 근원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남종의 선법이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근원을 꿰뚫게 하는 선적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적으로 교종만 우뚝하였다면 불교는 오늘날 미신과 같은 종교로 인식해버렸을 것이다.

선사는 근기에 상관없이 항상 본분사로서 사람을 제도한다. 만약 사람의 근기에만 맞추어 제도하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교법을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전법하여서는 부처님의 올바른 법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을 중시하는 교종에서 화엄경의 '중생이 곧 부처'라는 진리를 어떻게 교리로써 전달할 것인가? 선은 가지를 쳐내고 바로 들어가게 하여 사람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대승의 교리에 직접 부합하게 된다. 따라서 선법이야말로 부처님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최적절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묻는 자가 있어야 답도 있을 것이고 본분사로서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선사는 화두와 격외구 등을 들어 설법함으로 써 사람으로 하여금 묻게 만드는 것이다. 묻는 순간 선사의 대답은 곧 묻는 자의 뇌리를 때리게 되므로 깨달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학승이 물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즉심(卽心)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학인의 상량(商量:헤아림)이 허용됩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즉심을 놔두고 도대체 무엇을 상량하겠다는 것인가?"

問 從上至今卽心是佛 不卽心還許學人商量也無 師云 卽心且置 商量箇什麽


옛날부터 불교는 마음에 대한 법문을 해왔다. 마음이 부처, 중생이 부처라는 말은 모두 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마음은 원래 편안하고 태평하다. 이 평온한 마음은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지고 나온 천부적인 재질이다. 때문에 불조(佛祖)가 수없이 마음이 부처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 부처가 되기 위하여 닦지 말고 그 평온한 마음만을 잘 간직하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마음 외에 것에 대해서는 따로 불자들이 상량할 것은 없다. 인생사 희비애락이 한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고, 마음이 한번 쉬어지면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이 편안하면 땅바닥에 누울지라도 편안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천당에 가도 불편할 뿐이다."라고 설법하지 않았는가. 인간사가 다 마음의 문제인데 마음을 제외하고 더 이상 무엇을 상량하고 연구할 것이 또 있단 말인가. 불교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마음으로 끝낸다. 일단 마음이 한번 편안해져서 일평생 동요가 없다면 그 사람이 곧 금강불퇴지의 지혜를 얻은 부처이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http://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