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16 (100603) 신령스러움이란 무엇인가?

희명화 2015. 4. 8. 21:31

신령스러움이란 무엇인가?



학승이 물었다.
"말도 없고 뜻도 없어야 비로소 구(句)를 얻는다고 하는데, 이미 무언(無言)이라고 하면서 또 무슨 구(句)를 짓고 있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높아도 위험하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않아."
학승이 물었다.
"지금 화상께서는 가득차고 계시는 것입니까? 넘치고 계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자네가 나에게 묻는데 어쩌겠는가?"

問 無言無意 始稱得句 已是無言 喚什麽作句 師云 高而不危滿而不溢 學云 卽今和尙是滿是溢 師云 爭奈你問我

무언무의(無言無意)하여야 일구(一句)를 얻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일상사에서 매번 말하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 모두 세속의 이치에 부합시키고 있기 때문에 도의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말을 끊어버리고 저절로 각종 생각조차 무너져버려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말아야 가히 선과 도에 대하여 한 마디 던져볼 일구(一句)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어패가 있다. 무언무의라고 해놓고 다시 또 일구를 얻는다고 했으니 말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받을 만하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무언무의 뒤에 나온 일구는 좀 높고 가득 차 보여도 위험하지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무언무의를 거치지 않는 일구는 거칠고 투박한 일구이므로 사람을 상하게 하나, 무언무의의 시간을 거친 일구는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일구라는 것이다.

그러자, 학인은 "그러면 지금 화상의 말씀은 가득차고 계시는 것입니까? 넘치고 계시는 것입니까?"하고 되물었다. 여기에 대하여 "그것은 네가 판단해라. 나는 단지 묻는 것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을 뿐이다. 내 대답은 자네를 위협하거나 자네를 감당하기 어렵게 만들지 않아." 라는 뜻으로 대답하고 말을 마친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신령스러움(靈)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깨끗한 땅 위에 한 무더기 똥을 눈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확실한 의미를 알려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노승을 뇌란(惱亂)하게 하지 마라."

問 如何是靈者 師云 淨地上屙一堆屎 學云 請和尙的旨 師云 莫惱亂老僧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신령스러움'을 높이 떠받든다. 불교에서는 주로 사리의 영묘함을 선전하고 있고, 타 종교에서는 성모가 눈물을 흘린다거나 성자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강조하면서 신령스러움을 높이 부각하여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 한 무더기 똥을 예쁘게 포장하여 사람을 속이는 일 밖에 될 것이 없다. 사람들은 새롭고 신비함에 잘 이끌리고 동경하여 따르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신령스러움이란 잘 살펴보면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이 넓은 우주 속에서 사람의 눈동자처럼 신비롭고 신령스러운 것은 또 없다. 또 사람의 마음보다 더 신령스러운 것도 없다. 자신 속에 있는 신령스러움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유혹되는 것이다. 이참에, 적어도 21세기에 사는 사람이라면 똥을 포장한 것에 제발 이끌리지 말기 바란다.

학승이 질문하였다.
"법신은 무위(無爲)이므로 모든 헤아림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래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허용됩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조주 스님은 웃었다.

問 法身 無爲 不墮諸數 還許道也無 師云 作麽生道 學云 與麽卽不道也 師笑之

법신은 여기서는 진법(眞法)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참 된 법은 함(爲)이 없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행동을 보인다거나, 한 마디 말이라도 한다면 참된 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법에 대하여 뭐라고 한 마디 쯤은 표현할 수 있겠는가하고 학승이 물은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뭐라고 이를 것인가? 참된 법은 무위라고 하였는데, 무슨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글자 그대로야. 절대 말하지 못해!"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납자들은 깊은 곳을 즉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중생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야."
학승이 물었다.
"도대체 누가 중생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물어봐라, 물어봐!"

問 如何是佛 如何是衆生 師云 衆生卽是佛 佛卽是衆生 學云 未審兩箇那箇是衆生 師云 問問

중생과 부처에 대하여 본 <조주록>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데, 조주 스님은 매번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중생이 부처라는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니까 중생이 마음을 닦아서 부처가 되었을 때를 말하는구나하고 생각한다면 매우 잘못 이해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중생은 닦으나 안 닦으나, 깨달으나 못 깨달으나 원래 부처이다. 중생을 놔두고 부처는 따로 없다. 이것 외에는 만년을 지나도록 물어도 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굳이 부처와 중생을 구별한다면 스스로 위대한 부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부처이고,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중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기실은 알고 모름에 상관없이 중생은 원래부터 부처이다.

법화경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탕자가 스스로 거부장자의 아들인 것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거부장자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스스로 거부장자의 아들임을 모를 때도 사실은 거부 장자의 아들이었다. 그처럼 중생은 지금 그대로 부처이다. 이 사실을 알면 된다. 그러면 그대가 부처이다. 더 이상 무엇이 될 것은 없다. 불교는 이처럼 쉽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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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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