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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선사인가?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화상의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베풂이 없다."
問 如何是和尙意 師云 無施設處
선(禪)을 알리려면 진심직설(眞心直說)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잎을 설명하고 가지를 소개하는 방법으로는 선의 핵심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지름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가 하면 한 칼에 베어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가르쳐주기를 간절히 애걸복걸 청하여도 절대 한 마디로 베풀지 않기도 한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몹시 서운하다 할지 몰라도 나중에 깨닫고 보면 선사의 뜻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답에서 조주 스님이 베풂이 없다고 말한 것은 자상한 가르침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바로 가는 방법을 지시하기 때문에 때로는 야몰차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것이 조주가 사람을 접화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덕산 스님은 주장자를 내리쳐서 가르쳤고, 임제 스님은 소리를 꽥꽥 질러서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목주 스님은 찾아온 사람의 발목을 부러트리고, 달마 스님은 팔을 끊어 바치게 하였으니 선(禪)의 냉혹함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망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형제들이여, 다만 과거를 고치고 미래를 닦으라. 만일 과거를 고치지 않으면 그대들을 놓아둘 장소가 마련되어있다."
師上堂云 兄弟但改往修來 若不改大有著你處在
수행은 다만 과거의 잘못된 생각과 습성을 고치는 것이다. 사람 자체는 원래부터 깨끗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사람은 잘못된 앎과 잘못된 습성으로 중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더 이상 무엇이 될 것은 없다.
간혹 부처가 되겠다고 기를 쓰고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는 자이다. 그렇게 수행해서는 천만년을 지내면서 수행한다고 하여도 절대 부처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머리를 두고 머리를 찾는 것과 같고, 옷 속에 보배가 있는 데도 알지 못하고 걸인이 되어 거리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다.
이 법은 다만 자신의 출신을 한번 깨닫고 바로 부처의 길을 가면 그만이다. 혹 수행이 필요하다면 과거의 행위를 고치는 것일 뿐이지, 새로운 무엇이 될 것은 없다. 이것을 모르고 과거의 악습을 끊지 못하고 있거나, 과거의 악습을 고치는 것은 제쳐두고 엉뚱한 경계를 얻기 위하여 수행하고 있다면 머지않은 날에 쓴 맛을 보고 말 것이다.
"노승이 이곳에서 30년을 살아왔는데 선사(禪師)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설사 왔다고 하여도 하루 밤 한 끼를 먹고는 서둘러 떠나거나 또한 따듯한 곳을 찾아 가버렸다.
질문 "홀연히 선사가 찾아왔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조주 “천근이나 되는 노(弩:활 종류)는 생쥐 따위를 보고 쏘지 않아.”
老僧在此間三十餘年 未曾有一箇禪師到此間 設有來一宿一食急走過 且趁軟軟暖處去也 問 忽遇禪師到來 向伊道什麽 師云 千鈞之弩 不爲鼷鼠而發機
신라시대 명노사(名弩師) 구진산(仇珍山)은 여러 개의 활을 날릴 수 있는 강한 노(弩:쇠뇌, 활)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원전 2백년 경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힘이 얼마나 셌던지 무쇠솥 정도는 가볍게 들었다고 하였다.
선사(禪師)? 누가 선사인가? 조주 스님은 지금 30년을 지내보지만 선사는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천근이나 되는 노(弩)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선사에 비유한 것이다. 스스로 선사라 칭하면 벌써 선사가 아니다. 한낱 남의 물건을 도둑질이나 하는 생쥐에 불과할 뿐이다. 조주 스님은 진정한 선사라면 그런 엉터리 선사와는 아무런 대담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선(禪)을 아는 사람은 스스로 선사라 칭하지 않는다. 이 법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적용된다. 진성한 선사는 평범하다.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거나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도를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남쪽에서 오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사람을 위하여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려줄 것이고, 만일 북쪽에서 오는 자가 있으면 곧 짐을 실어줄 것이다. 까닭으로 이르기를 ‘상급 인물에 다가가서 도를 물으면 도를 잃고 하급 인물에 다가가서 도를 물으면 도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師云 兄弟若從南方來者 卽與下載 若從北方來 卽與裝載 所以道 近上人問道卽失道 近下人問道者卽得道
이 설법은 조주 스님이 유난히 북쪽에서 온 납자들을 싫어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남쪽에서 온 자라면 짐을 덜어주지만 북쪽에서 오는 자들은 스스로 짐만 짊어지고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상급인을 가까이 하면 도를 잃지만 하급인을 가까이하면 도를 얻는다고 짤막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조주 스님의 저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추측컨대 여기서 북쪽은 북종선을 두고 한 말로 보여 진다. 육조 혜능 스님이 선법을 펼치기 시작한 이래로 북쪽은 신수종이라하여 닦는 것을 강조한 선불교의 교세를 확충시켰고, 남쪽은 혜능종, 혹은 돈종(頓宗)이라 하여 깨닫는 즉시 닦음도 마친다(悟人頓修)는 선법으로 갈라져 있었다.
홍인의 법은 홍인의 맡 제자 신수를 제치고 막내 혜능이 이었지만, 나중에 신수는 북쪽에서 선법을 크게 펼쳤다. 신수는 국사의 지위에 까지 이르러 개인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선사이다. 반대로 혜능은 남쪽에서 선법을 펼쳤지만 혜능은 글자를 모르는 나무꾼 출신이고 거의 산중에서 생활하여 남쪽 선객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높았을 뿐이다.
조주 스님은 남전 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전은 육조 혜능 계열의 제자이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선법은 돈법(頓法)이고 깨닫는 즉시 닦음도 마친 붓다임을 강조한 선법이다. 조주 스님의 이러한 선법은 남종(南宗)의 문하라면 즉시 이해되는 선법이고 그동안 쌓아온 온갖 지식을 떨쳐버리고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짐을 덜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북종(北宗)의 문하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짐을 더 짊어지고 가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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