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13 (100509) 조주의 일구(一句)

희명화 2015. 4. 8. 21:29



조주의 일구(一句)


물음 “조주의 1구는 무엇입니까?”
조주 “반구(半句)도 없어.”
학승 “어찌 화상(和尙)께서 없을 수 있습니까?”
조주 “노승은 1구(一句)를 인정하지 않아.”

問 如何是 趙州一句 師云 半句也無 學云 豈無和尙在 師云 老僧不是一句

일구는 선사들이 던지는 한 마디이다. 보통 선사들은 선객들을 접화할 때 자주 쓰는 일구를 가지고 있다. 그 일구는 선에 들어맞고 도에 들어맞는 한 마디이다. 이 일구는 가끔 선객들의 화두가 되기도 하는데, 선의 핵심을 관통하는 한 마디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선객들이 귀중하게 여긴다.

학승은 조주 스님이 귀중하게 여기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조주의 일구를 물었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일구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아니, 조주 자신은 평소 반구조차 두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禪)의 핵심에 들어가려면 일구조차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선의 핵심부를 아는 데에는 정제된 일구조차도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가끔 선승들이 선구 한 마디나 선적인 사상이 담긴 구절을 거울로 삼으면서 평생 간직하는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조주 선사는 그러한 것을 전혀 두지 않고 살아간 선승이다.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혹 기이한 행동이나 방할을 자유롭게 구사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도의 실체를 그대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이 문답은 어떤 문구나 사상에 사로 잡혀 있으면 그 문구 때문에 오히려 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한 선문답이다.

물음 “어떻게 하면 모든 경계에 유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스님은 한 쪽 다리를 드리웠다.
학승이 곧 신발을 내놓았다.
조주 스님은 발을 도로 끌어당겼다.
학승은 아무 말이 없었다.

問 如何得不被諸境惑 師垂一足 僧便出鞋 師收起足 僧無語

선은 유혹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 혹은 온갖 진리나 주의주장은 모두 허망한 개념 위에 계속 지식을 쌓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세상사 이치는 양파가 그 알맹이는 없이 모두 껍데기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세상사 이치는 진실에 근접하지 않는다.

선을 추구하는 학자들은 아무리 작은 것에도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느 때든지 본래 마음을 잘 지키고 어떤 상황에도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희비애락과 분노에 대해서도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조주 선사는 학승이 신발을 내놓자 스스로 들었던 다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임으로써 아무리 작은 것에도 유혹되지 않는 경계를 보여주었다. 도를 실천하는 것은 일상사에 있는 것이지 특별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어떤 관리가 물었다.
물음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께 귀의하였지만 부처님이 멸도하신 다음에는 일체 중생이 어디에 귀의합니까?”
조주 “중생이란 있은 적이 없어.”
관리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조주 “다시 무슨 부처를 찾는가?”

有俗官問 佛在日 一切衆生歸依佛 不滅度後 一切衆生歸依什麽處 師云 未有衆生 學云 現問次 師云 更覓什麽佛

흔히 사람들은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 부처님은 없어졌다고 말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불교를 절대 잘못 안 것이다. 부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중생은 없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사람이 어리석고 집착이 강해서 자기 자신을 부처로 보지 못하고 중생으로 보는 것이다.

진실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은 아무나 갖춘 것이 아니다. 객관적 관점을 얻은 사람만 진실을 본다. 선사는 깨달음을 통하여 영혼에서부터 관점이 바뀐 사람이다. 선사는 항상 진실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간혹 선사가 바라보는 눈은 도인의 안목이기 때문에 중생과 다른 차원에서 본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중생이 보는 눈과 선사가 보는 눈은 같다.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것은 없다. 다만 선사는 중생을 모두 진짜 부처로 보지만 중생은 스스로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위 문답에서 조주 스님은 마지막으로 “중생을 두고 다시 또 무슨 부처를 찾는가?”하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인데 도대체 무슨 부처가 멸도하였단 말인가?” 하는 날카로운 지적인 것이다.

물음 "4은 3유에 보답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조주 "있다."
학승 "어떤 자입니까?"
조주 "아버지를 죽인 자이다. 너는 다만 이 한 물음이 부족하였구나."

問 還有佛報四恩三有者也無 師云 有 學云 如何是 師云 這殺父漢 筭你只少此一問

<심지관경>에 4은은 삼보(三寶)의 은, 국왕의 은, 부모의 은, 중생의 은이라고 하였다. 3유는 3계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생유(生有: 태어날 때), 본유(本有: 성장하였을 때), 사유(死有:죽을 때)를 말하기도 한다. 결국 일생 동안 받은 4가지 은혜가 4은3유(四恩三有)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는 당연히 4은을 저버린 자이다. 그 과보는 매우 무거워서 고통이 쉬지 않는 무간 지옥에 들어가 수많은 시간을 참혹하게 형벌을 받는다. 그런데 아버지를 실제 죽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단절한 사람이 있다. 바로 출가자이다. 출가자는 법을 체득하기 위하여 엄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므로 부모 자식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야 한다. 혹 도를 얻어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하여도 일체 중생의 어버이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적인 부모에 얽매이면 안 된다. 출가 사문은 글자 그대로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죽인 사람이다.

승려가 처음 출가할 때에는 부모에게 마지막 절을 하고 국왕에게 마지막 절을 하는 의식이 있다. 이후 출가인으로서 세속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불법을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어 일체 중생의 스승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출가사문은 아무에게도 먼저 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왕과 부모가 출가한 스님에게 스승의 예우를 갖추어 절을 해야 하는 것이 출가법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가 사은삼유를 저버린 자임은 당연한 것이다. 조주 스님은 마지막 대답에서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학승을 질책하고 있지만, "아버지를 죽인 자이다"라는 대답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다.

출가인이 열심히 수행하여 도를 얻으면 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국왕과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 되지만, 혹 일생동안 수행한다고 하면서 결국 도를 얻지 못하면 부모와 국왕의 은혜는 고사하고 자기 한 몸조차 제대로 건수하지 못한 것이 되므로 일생을 허비하고 만 것이니, 이것만큼 허망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국왕과 부모의 은혜를 저버린 과보는 나중에 따지더라도 당장 일생을 산중에서 허비한 죄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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