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도(道)입니까?
물음 "무엇이 도(道)입니까?" 조주 "어딜 감히, 감히…"
問 如何是道 師云 不敢不敢
도에 대하여 묻는가, 역대로 도의 본질에 대하여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는 깊고 은밀하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숨어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만사(萬事)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만물(萬物)에 들어있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도는 세상사의 근원인 것이다.
도는 이렇게 만사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지만 그 도를 사람은 볼 수 없고, 인위적으로 나타나게 할 수도 없다. 도는 붙들려하면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도를 어떻게 말로 설명하란 말인가. 도를 알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세상이 한 눈에 내려다보듯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오면 세상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때서야 비로소 도가 보인다.
물음 "현중의 현(玄中玄)은 무엇입니까?" 조주 "얼마나 오래 현(玄)하였는가?" 학승 "오래 되었습니다." 조주 "노승을 만난 것이 다행이지, 현(玄)이 이 못난이를 죽일 뻔했구나."
問 如何是玄中玄 師云 玄來多少時也 學云玄來久矣 師云 賴遇老僧泊合 玄殺這屢生
현중의 현은 깊은 경계 중에서도 깊은 경계를 말한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항상 깊은 경계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질문한 학승도 오랫동안 깊은 경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예를 들어, 오매일여나 숙면일여까지 들어가 숙면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가 살아있다면 상당 부분 무의식을 극복한 경계이다.
이렇게 깊이 들어간 사람은 '이 외에 더 깊은 경지는 없는가?'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현의 경계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서도 깊은 경계에 들어간 학인을 못난이(屢生)라고 비웃고 있다. 현에 빠지면 현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조주 스님은 이외에도 <조주록>에서 여러 번 현(玄)을 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였다.
조주는 왜 현을 부정하는가? 현의 경계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사가 도이다. 여기서 유혹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높은 경계이다. 그것을 모르고 평생 현에 빠져있다면 현이 사람을 바보로 만들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음 "무엇이 학인의 자기(自己)입니까?" 조주 "뜰 앞의 잣나무를 보아라."
問 如何是學人自己 師云 還見庭前柏樹子
학인의 '자기'는 학인의 '주인공'을 말한다. 흔히 자성, 본성 등으로 표현한다. 학인이 자기의 주인공을 묻는 것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뜰 앞의 잣나무를 보아라." 라는 말 보다 더 정확하게 주인공을 알게 해주는 방법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화두 같지만 화두가 아니다. 그러나 화두처럼 곰곰이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는 말이다. 힌트를 낸다면 잣나무에 절대 뜻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잣나무가 등장한 것은 조주 스님이 기거하는 방의 뜰 앞에 잣나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에 단풍나무가 있었다면 "저 단풍나무를 보아라." 하고 말하였을 것이다. 독자들이 생각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분분은 해설하지 않겠다. 독자들이 한번 풀어보기 바란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화두가 아니다.
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오래 참선해온 납자라면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고금을 통달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신참자라면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여 얻어야 한다. 그대들은 3백, 5백, 혹은 천 명의 대중을 쫓아가거나, 비구 비구니에 치우치지 말라. 총림의 주지라고 자칭하면서 막상 불법에 대하여 물으면 마치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처럼 한마디 말도 할 줄 모른다. 그러면서 도리어 남은 그르고 나는 옳다고 하면서 얼굴에 열을 올리니 세간 사람들이 점잖지 못한 막말을 하는 것이다. 진실로 불법의 진수를 밝히려는 뜻이 있다면 노승이 당부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말라."
師上堂云 若是久參底人 莫非眞實 莫非亘古亘今 若是新入衆底人也 須究理始得 莫趁者邊三百五百一千 傍邊二衆 叢林稱道好箇住持 泊乎問著佛法 恰似炒沙作飯相似 無可施爲 無可下口 卻言他非我是 面赫赤地 良由世間出非法語 眞實欲明者意 莫辜負老僧
옛날이나 지금이나 올바른 수행자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수행자라는 허울만 뒤집어 쓴 채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조주 선사의 이 당부는 수행자들이 깊이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문구이다.
오늘날 불교대학을 졸업한 승려들은 무엇보다 먼저 불법의 진수를 얻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초발심이 곧 정각이라고 하였다. 초심자 때에 깨달아야 한다. 일단 깨닫고 수행해간다면 일상사가 곧 수행이 될 것이므로 결코 남에게 욕먹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불교대학 졸업을 마치 주지되는 자격을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절에 주지가 되는 것은 깨달은 불법을 전달하기 위해서 부득불 잠시 맡는 소임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승려가 되는 것이 마치 주지가 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불법은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자고로 대국의 멸망은 외부 세력보다는 내부의 병폐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주지가 되려고 출가한 자들은 중이 되면 깨달음은 얻기 위한 수행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지가 되기 위하여 온갖 치사한 짓을 무릅쓰고 한다. 그렇게 해서 주지가 되어도 바른 법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누가 불법을 물으면 되지도 않는 말을 맞는 이치라고 떠들고 다닌다. 대궐 같은 절을 지어놓고 거미처럼 엎드려서 어리석은 신도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절의 위세에 눌려 신도가 많아지면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으스대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망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음 "참다운 교화는 흔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스승도 제자도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누가 너에게 와서 물으라(問) 했는가?" 학승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조주 스님은 문득 한 때 때렸다.
問 眞化無跡無師弟子時如何 師云 誰敎你來問 學云 更不是別人 師便打之
조주 스님은 이 땅 위에 사는 이상 스승과 제자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없다니, 어떻게 없을 수 있는가. 조주 스님은 학인에게 "누가 너에게 와서 물으라(問) 했는가?"하고 물은 것은 너에게 묻도록 한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그 자가 있다면 스승이 있는 것 아닌가. 너에게 가서 묻도록 지시하는 자가 있으니 그자가 스승이야." 하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학인은 못 알아듣고 누가 특별히 가라해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너의 말은 틀렸다. 분명 네가 와서 질문할 때는 누군가 질문하도록 시킨 자가 있어. 모르겠는가? 자, 내가 한번 그 자를 보일 테니 똑바로 알아라." 하고 때린 것이다. 조주 스님의 이 일방은 자비가 넘치는 일방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