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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일구인가?
물음 “1구(一句)란 무엇입니까?” 조주 “만일 1구를 지키고 있다가는 너는 어느 새 늙어버릴거야.”
問 如何是一句 師云 若守著一句老卻你
1구란 부처님이나 선사들이나 던진 한 마디이다. 요즘의 말로는 핵심적 한 마디이다. 불법을 드러내고, 도를 드러내는 1구는 혹은 화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도에 대한 함축적인 비유나 간단 문구일 수도 있다.
선가에서 골똘히 생각하며 탐구하는 과제는 ‘뜰 앞의 잣나무’, ‘조주 무자’, ‘판치생모’, ‘무모미생전’, ‘덕산탁발화’ 등의 화두를 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뜻을 알아보려고 하루 종일 혹은 꿈속에서도 화두의 뜻을 생각하고 탐구한다.
그런데 한동안 1구를 지키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화두는 화두라는 글자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화두 바깥에 답이 있다. 화두의 의미를 안 사람들은 모두 화두 바깥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나중에 화두를 집어던져버렸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려면 빨리 화두를 타파하고 부처의 행으로 돌입하여야 한다.
부처가 부처의 행을 하지 않고 화두라는 글자(1구)에 갇혀버린 채 홀딱 늙어버렸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인생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임제 스님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향하여 ‘자기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부처라는 말이다. 이렇게 알면 그만이지, 또 다시 부처가 되려고 세월을 보내지 말라. 그것만큼 쓸데없는 짓은 없다.
조주 스님이 또 말하였다.
“만일 일생동안 총림을 떠나지 않고 5년이나 10년 동안 말을 하지 않을 때 너희들을 벙어리라고 하는 자가 없다면 이후 부처라도 너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노승의 머리를 잘라가라.”
師又云 若一生不離叢林 不語十年五載 無人喚你作啞漢 已後佛也不奈何 你若不信 截取老僧頭去
5년이나 10년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 만큼 망상이 준다는 말이고, 또한 남과 말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였다는 말이다. 원래 벙어리가 아니고 다만 수행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대중이 이구동성으로 알 정도라면 그만큼 수행에 몰두하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망상을 피우지 않고 5년에서 10년간만 화두 하나에 목숨을 건다면 누구든지 부처 이상의 경지에 오를 것을 맹세한다고 조주 스님은 말하고 있다. 이 맹세 법문은 조주 스님이 처음 남전 스님에게 출가한지 5,10년 만에 도를 깨달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5년에서 10년은 사실 조주 스님이 넉넉하게 말한 것이다. 적어도 목을 걸 정도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좀 더 시간을 준 것이다. 옛 사람들은 단 한 번의 말 한 마디에 그 깊은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많이 있다. 중국의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임제, 대혜 스님 등이 다 그러하였고, 덕산 스님은 촛불이 꺼지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또, 옛 선사는 7일간 정성을 다하여 수행하여도 깨닫지 못하면 목을 베어가라고 단연코 말한 적도 있다. 깨달음을 위하여 평생 시간을 보낼 일이 아니다. 마음이 정성스럽고 간절하다면 한 글자, 한마디에도 즉시 깨닫고 만다. 그대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혹 늦더라도 5년, 10년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 시간이 걸리는 것은 선의 정법을 뒤로 하고 헛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주 스님이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형제들이여, 자네들은 틀림없이 3생의 업보 속에 있다. 까닭으로 이르기를 ‘다만 과거의 행위만 고치고 과거의 사람은 고치지 말라’하였다. 너희들과 함께 출가하여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데, 재삼 선(禪)을 묻고 도(道)를 묻기 위하여 2,30명씩 몰려와서 묻는다. 마치 선도(禪道)에 흠이라도 있기라도 하듯이. 설사 자네들이 나를 선지식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자네들과 함께 벌을 받아야할 사람에 불과하다. 이 노승은 원래 즐겨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저 옛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동(東)이야, 서(西)야 하고 설법하고 있을 뿐이다.”
師上堂云 兄弟你正在三冤裡 所以道 但改舊時行履處 莫改舊時人 共你各自家出家以來無事 更問禪問道 三十二十人聚頭來問 恰似欠伊禪道 相似你喚作善知識 我是同受拷 老僧不是戱好 恐帶累他古人 所以東道西說
사람이 업보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 위대한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도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깨닫는 순간 육신에 물리적인 변형이 일어나 부처라고 하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 한다. 깨달음을 통하여 과거의 행위만 고치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나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다. 더 이상 무엇이 될 것은 없다.
조주 선사는 수행자는 다만 과거의 행위만 고칠 뿐이지, 더 이상 선지식이라고 부르는 누구를 찾아가서 선을 묻고 도를 묻는 행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행동들은 마치 멀쩡한 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따지러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조주 선사가 이렇게 말한 저의는 중생은 원래 부처라는 사상이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깨닫는 즉시 완성이다. 수행자는 다만 오래 묵은 중생의 습성을 제거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더 이상 선도를 묻거나 선지식을 찾는 일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납자들이 찾아와서 자신을 선지식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양자(兩者)가 다 죄를 짓는 행위라고 설법하고 있다. 사람은 원래 완벽하다. 완벽한 자가 무엇 때문에 다시 선지식을 찾아야 하겠는가. 완벽한 자가 완벽한 자를 만날 때는 그냥 대등하게 차나 마시면 된다. 평범한 산중 사람에게 ‘선지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깨끗한 곳에 티를 묻히는 결과 밖에 안 된다.
말이야 다 맞는 말이지만, 선사가 자기를 두고 선지식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사람의 말이 아니다. 진정한 선사가 아니면 이렇게 말하기 쉽지 않다. 요즘은 누구나 선생이 되고 싶어 하고 윗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진정한 선사는 선지식이라는 칭호에 집착하지 않는다. 선사는 다만 옛 사람들이 미몽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준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동도서설(東道西說)을 늘어놓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완벽한 부처이다. 사람은 원래 깨끗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본성은 어떠한 환경을 만나고 경험하여도 전혀 물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자기 자신이 본래부터 부처임을 즉시 깨달으라.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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