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7 (100324) 다시 무엇을 싫어하는가?

희명화 2015. 4. 8. 21:27

 

 

 

 

 

 

 

 

다시 무엇을 싫어하는가?

 


<조주록>은 초반부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과의 선문답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평이하고 짧은 비유로 불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조주록>전체가 쉬운 비유로만 구성된 것은 결코 아니다. <조주록> 속에는 간혹 중진 납자도 쩔쩔 맬 만한 공안이 나온다. 이런 것은 당연히 화두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조주록>은 공안의 성격을 띤 화두가 많은 선서가 아니고, 납자가 조금만 명상에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곧 알아낼 수 있는 은유나 비유적인 대담이 많다. 그래서 선을 알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선서인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도 평이한 대담 속에 불법의 큰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들이다.

물음 “‘법(法)은 특별한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도대체 법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밖에도 공하고 안도 공하며, 안팎이 모두 공하다.”

問 法無別法 如何是法 師云 外空內空內外空

법은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요즘은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예전에는 ‘법’이라는 말로 진리를 대변하였다. 불변의 진리는 무엇일까? 이것도 진리를 탐구하는 납자들에게는 하나의 화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조주 스님은 “밖에도 공하고 안도 공하며, 안팎이 모두 공하다.”하고 간단히 답변하고 있다.

여기서 법은 사람의 머리 속의 지식이나 마음을 말하고, 밖은 외부의 모든 현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내외가 공하다는 것은 일체가 공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한 ‘법은 곧 공(空)’이라는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삼라만상은 공(空)이라는 한 글자로 대변할 수 있다. 동서양의 현자들이 생각하였던 철학의 이상과 모든 성인이 보았던 궁극의 한 지점은 결국 공(空)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너절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곧 알 일이다.

물음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法身)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다시 무엇을 싫어하는가?”

問 如何是佛眞法身 師云 更嫌什麽

법신은 부처님의 몸을 3가지로 표현한 것 중에 하나인 ‘진리의 몸’을 말한다. 의미상으로는 ‘불변의 몸’ ‘진정한 부처’라는 말이다. 독자들에게는 ‘진정한 부처’라는 말이 더 실감이 갈 것이다.

질문을 다시 요약하면 “진정한 부처는 무엇입니까?”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다시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으로 툭 대답하고 말았다. 부처를 묻는데 싫어하다니? 도대체 이 무슨 뜬 구름 같은 소리인가? 이것은 깊은 공안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곧 풀어질 내용이다.

이와 관련된 해답으로 본 납자가 본 조주록선해 첫 회에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육조 스님도 강조한 것이고, 임제 스님도 강조했던 바이고 모든 선사가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힌트를 내놓는다면 ‘부처는 싫어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위 조주 스님이 말한 뜻을 정확히 풀어낸다면 선사상의 중심축을 얻은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희열이 올 수도 있다.

물음 “무엇이 손님(賓)중에 주인입니까?”
조주 “나는 각시 얻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어.”
물음 “무엇이 주인 중에 손님입니까?”
조주 “나는 장인이 없어.”

問 如何是賓中主 師云 山僧不問婦 問 如何是主中賓 師云 老僧無丈人


방장이 주인이라면 객승은 손님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대담하다 보면 객이 주가 되고 방장은 빈이 되는 수가 있다. 이러한 빈주(賓主)에 대한 법문은 당시 유행하던 하나의 화제 거리였다. 그 빈주 법문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조주 스님이게 물으니 조주 스님은 독특한 선기로 대답한 것이다.

신랑은 각시를 받아들이는 쪽이므로 신랑을 주인으로 보면 각시는 손님이다. 그런데 손님중에 나이 많은 어른이 있으면 당연히 그는 손님 중에 주가 되므로 모두 나아가 인사를 한다. 이러한 역학 구도를 가지고 조주 스님은 빈주 법문을 간단하게 일축하고 있다. 즉, 조주 스님은 각시를 얻는 것에도 관심 없고, 장인도 없다 하였으니 빈주에 대하여 도무지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공연히 주이니, 빈이니 하고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 관심을 세우는 것이지, 조주 스님은 그런 것에 무관심한 지 이미 오래라는 말이다.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보물은 한낱 돌덩이와 다름없는 것이 되고 만다. 가치라는 것도 사람들이 매긴 가치이지 본래부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물음 “일체 법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 “나는 조상도 꺼리지 않네.”
그 학승이 다시 한 번 더 질문하였다. 조주 스님이 이르기를
“오늘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겠어.”

問 如何是一切法常主 師云 老僧不諱祖 其僧再問 師云 今日不答話

일체법이 상주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은 영원불멸하므로 언제까지나 이 땅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은 신을 믿으라고 설파하는 종교도 아니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진리라고 설파한 적도 없다. 항상 진리에 부합하고, 마음에 대한 다양한 심리를 표현한 것이라서 누가 들어도 객관적 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는 만고불변의 진리로써 오래오래 위대한 인류의 보고로 남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불교는 ‘일체법은 상주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 조주 스님은 그런 사상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부서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일체법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멸한다는 것이 법칙이다. 어찌 불법이 상주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은 누구나 존중한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법(禪法)은 부처도 넘어가고 조사로 넘어가는 것을 최고로 친다. 일종의 청출어람이다. 제자가 천하에 우뚝 서지 않으면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이 선가의 법이다. 본 <조주록> 전반부에서도 조주 스님은 스승을 밟아버리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대목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전통 선가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바로 “나는 조상도 꺼리지 않아.”라는 말이다. 즉, “무슨 상주(常主)운운하는가, 나는 스승을 넘어갔고, 나도 언젠가 내 제자에게 당할 것이야. 영원한 것은 없어. 그것이 법이야.” 라는 의미인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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