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8 (100331) 고금의 기준

희명화 2015. 4. 8. 21:28

 

 

 

 

 

 

 

 

고금(古今)의 기준



하루는 조주 스님이 법당에서 설법하였다. “형제들이여, 설법을 들으려고 오랫동안 서 있을 필요 없다. 일이 있으면 상량(商量:헤아림)하겠지만, 일이 없으면 선당에서 좌선하면서 법을 궁리하는 것이 좋다. 노승이 행각시절에는 하루 두 때 식사를 위한 자질구레한 용심을 제외하고는 따로 그 밖에 다시 용심처가 없었다. 만일 그와 같지 않다면 출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師上堂云 兄弟莫久立 有事商量 無事向依 下座窮理好 老僧行脚時 除二時齋粥 是雜用心力處 餘外更無別用心處 若不如此 出家大遠在

수행자에게도 일이 있을 때는 생각을 굴려야 할 때가 있다. 수행승도 사람이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최소한의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럴 때 생각을 굴리는 것은 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득한 경우이다. 또한 밥을 먹기 위하여 자질구레한 마음을 쓰는 것도 부득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조용히 좌선하면서 화두를 궁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연히 하루 종일 잡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어찌 수행자라 하겠는가.

무심히 살아가는 수행은 출가자나 재가자의 기본 수행이 되므로 이 조주 스님의 설법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어떤 것을 보고 당해도 무심으로 넘어가는 수행은 노년이 되어도 계속 되어야 한다.


물음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무엇입니까?”
조주 “고금(古今)의 기준이야.”
問 如何是心地法門 師云 古今榜樣

심지법문이란 마음에 대한 법문을 말한다. 조주 스님은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고금의 기준이 된다고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세상사 복잡하고 많은 것이 있지만, 모든 것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인간사에서 마음을 빼놓고 도대체 무엇이 더 의미가 있단 말인가. 종국에는 돈도 명예도 별 의미가 없다. 마음, 오로지 이 마음 하나만 편안하다면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

얼마 전에 지인이 위암으로 죽었다. 52세의 여자였다. 나는 문상객들 틈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평소 고인을 잘 아는 어떤 부인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고인이 그동안 먹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모아서 이제 겨우 시내에 상가 하나를 장만하였기 때문에 세를 받기만 하여도 퇴직한 남편과 함께 노년에 그럭저럭 살아갈만한 위치에 왔는데, 그만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평소 구두쇠이고 변덕이 있고 잔소리도 많고 애정 표현도 없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나중에 남편이 와서 49재를 경비를 결정하는데, 최하위 금액을 선택하여 49재를 지내기로 하였다. 그후 고인의 막역한 친구가 절에 와서 영단에 절하면서 울먹이며 말하길, "비록 화장이라 하지만 수의도 최하짜리를 선택하더니 고인을 위한 천도재 경비도 그렇게 싸게 하였다"면서 못내 서운해 하였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이 친구야, 살아있을 때 여행가고, 잘 먹고 편안하게 살 것이지,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 라고 말하면서 영전 앞에서 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가 중요하다.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49재 경비는 최하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쁘고 힘들어도 매번 적재적시에 마음을 위로하는 말 한 마디쯤은 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평소에 “여보 사랑해.”, “힘들지? 오늘 맛있는 것 사줄 테니 나와요.”, “작지만 내 마음이 담긴 선물이야.” 라는 식의 애정의 말은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큰 행복이 담긴 선물일 텐데 그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물음 “만물 중에 무엇이 가장 견고합니까?”
조주 “쳐다보고 욕을 한다면 네가 입이 닳도록 마구 퍼부어도 좋고, 쳐다보고 침을 뱉는다면 네가 차라리 침보다 더한 찬물을 퍼부어도 좋아.”
問 萬物中下物最堅 師云 相罵饒汝接嘴 相唾饒汝潑水

무엇이 가장 견고한 것인가? 조주 스님은 그것이 ‘마음’만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비어서 형체가 없다. 따라서 무슨 상처를 받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본래 아무리 욕보다 더한 모욕을 주어도 무심한 것이고, 얼굴에 침을 뱉고 찬 물을 끼얹어도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질이다.

그런데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이 허상을 잡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 다쳤다는 생각을 일으켜 세우면 가상의 마음이라는 실체가 만들어져서 상처를 받는다. 결국 자기의 한 생각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 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라. 마음이 원래 형체가 있는 것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즉시 깨달으라. 마음은 본래부터 비어있는 것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너질 것이 없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희한하게도 일체 고뇌는 사라질 것이다.


물음 “새벽이나 밤이나 쉬지 않는 경우는 어떠합니까?”
조주 “승려 중에 두 번 세금을 바치는 백성과 같은 사람은 없어.”
問 曉夜不停時如何 師云 僧中無與兩稅百姓

세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도 피와 같은 세금까지 바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승려는 대궐 같은 사원에 살면서 일하지 않아도 밥을 주고 옷을 주고 재워준다. 게다가 승려는 세금마저 감면해준다. 그러므로 승려가 아무리 밤낮으로 열심히 수행한다고 하여도 일 년에 두 번 세금을 바치는 백성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처음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열심히 수도하여 도를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수행은 정해진 시간을 지키고 입선시간에 앉아있기만 한다고 국은과 시은을 다 갚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은혜를 갚는 일은 오로지 화두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고 일체 중생에게 불법을 제대로 전달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원한 문제도 아니다. 다만 일구월심 불퇴전의 신심으로 화두 하나에 몸과 마음을 송두리 채 바친다면 반드시 그 뜻을 캘 날이 오게 되어있다.

수행자의 길은 칼 날 위를 걷는 길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잘못하면 도를 이루는 것은 고사하고 평생 갚지 못할 시은만 가득 짊어진 채 비참한 미래 과보만 부르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출가하였으면 도를 이루는 그날까지 쉬지 말고 탐구하고 정진하여야 한다. 이절 저절 떠돌아다니거나, 출가자가 부와 명예를 탐닉하는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무사안일하게 지내면서 뱃속에 기름 진 공양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세월만 허비하고 만다면 허망한 인생 머지않아 저승사자를 만날 때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루고 말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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