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6 (100317) 본분작가(本分作家)

희명화 2015. 4. 8. 21:26

 

 

 

 

 

 

 

 

본분작가(本分作家)



조주 스님은 또 말하였다. 내가 90년 전에 마조 대사 문하에서 80여 명의 선지식을 뵈었지만 한 분 한 분 모두 훌륭한 본분 작가(本分作家)였다. 요즘 사람들의 정신은 가지와 덩굴만 무성한 채 대도시에 들어가므로 성인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일대(一代)마다 점점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다만 남전 스님이 “이류(異類) 중에 나아가라.” 하였는데 또한 그 뜻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 요즘 부리가 노란 햇병아리들이 네거리 가두에 나아가 어지러운 덩굴 덩어리를 설법하고 밥을 얻어먹으면서 예배할 것을 원하고, 3백 명, 5백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나는 선지식이고 너희는 학인이다.” 하고 떠들고 있다.

師又云 老僧九十年前 見馬祖大師下八十餘員善知識 箇箇俱是作家 不似如今知識枝蔓上生枝蔓 大都是去聖遙遠 一代不如一代 只如南泉尋常道 須向異類中行 且作麽生會 如今黃口小兒 向十字街頭 說葛藤博飯噇 覓禮拜 聚三五百衆云 我是善知識 你是學人

조주 스님이 90년 전에 마조 문하에서 80여 명의 선지식을 뵈었다는 말은 본 <조주록>의 내용이 어느 시기의 것인가를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조주 스님은 어릴 때 출가한 것으로 알려졌고, 남전 스님을 법사로 모실 때까지도 사미였기 때문에 20세 전에 남전 스님을 만났다. 그런데 남전 스님도 마조 문하이므로 90년 전 마조 문하가 어디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거의 40년간을 남전 스님 옆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20대 이후는 다른 마조 문하에 가지 않은 듯하고, 20세 전에는 법사를 찾기 위하여 이리 저리 행각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20세 전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조주록>의 이 내용은 대략 110세 전후의 글이라는 말이 된다.

분분작가(本分作家)는 본분사를 가르치는 경지를 말하는데, 선사는 어떤 질문에 대하여 미리 답을 찾아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 묻는 자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한다. 선사의 대답은 질문자가 깨닫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있기 때문에 순간 방, 할, 격외구, 선구 등을 사용하여 질문의 근원에 합당한 답변을 한다. 이것은 마치 노련한 작가가 한 폭의 그림을 단번에 그려내는 것과 같아 선사의 답변도 한순간 지고 무쌍한 한 방편이 나오는 것이다. 듣는 자가 나중에 그 뜻을 알았을 때는 기막히게 도에 부합하기 때문에 무릎을 치고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선사를 본분작가라고 말한다.

이류(異類)는 '산중 바깥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므로 시정(市井)의 사람들이다. 남전 스님은 <조주록> 앞부분에서 '도를 얻은 사람은 산문 앞 시주집의 소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류 중에 들어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문답에는 먼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도를 알지 못하고 시정에 나아갔다가는 자신이 먼저 흙탕물에 빠져버릴 수 있으므로 남을 제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하나 단속도 못하게 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도를 얻었다하여도 한낱 이류의 심부름꾼이나 일꾼일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의 사정상 출가 승려가 반드시 깨닫고 난 다음 도시에서 포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도시 사찰에 사는 승려들은 적어도 이 조주 스님의 경책은 깊이 새겨야 한다. 비록 옛 선사의 말대로 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출가자는 항상 겸손하여야 하고, 남에게 존경받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도시에 나와 있어도 검소한 수행자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하고, 선(禪)을 알지도 모르면서 공연이 이설저설을 들이대면서 이것이 선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부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사명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문승 “청정한 사원(寺院)이란 어떤 것입니까?”
조주 “머리를 딴 소녀이다.”
문승 “사원 속의 사람은 무엇입니까?”
조주 “머리를 딴 소녀가 애를 밴 것이다.”

僧問 如何是淸靜伽藍 師云 丫角女子 如何是伽藍中人 師云 丫角女子有

청정한 사원을 머리를 딴 소녀로 비유한 것은 소녀는 아직 남자의 손이 닿지 않은 청정한 상태를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원 속의 사람은 출가한 승려들을 말하는 것인데, 출가자를 청정한 여자가 애를 밴 것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청정한 도량은 장차 부처가 될 사람이 태어나는 장소로 본 것이다. 출가는 도피나 일신의 안일을 위한 행위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되어 태어나는 장소라는 것을 조주 스님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또 하나는 소녀가 애를 배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위법이요, 비윤리적인 일이다. 따라서 조주 스님의 이 비유는 ‘있을 필요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본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출가자를 필요 없는 짓을 하는 자로 간주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선사(禪師)는 중생을 본래부터 깨끗한 부처로 보기 때문이다. 원래 부처가 또 부처가 되려고 출가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물음 “들은 바에 의하면 화상께서 친히 남전 노스님을 친견하였다는데 사실입니까?”
조주 “진주(鎭州)에 가야 큰 무가 나와.”

 

問 承聞和尙親見南泉是否 師云 鎭州出大蘿蔔頭

당시 진주는 큰 무가 나오는 고장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조주선사가 하고 싶은 말은 불법을 제대로 배우려면 훌륭한 스승이 있는 도량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불교도 불법을 제대로 알려면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특히 선법은 법을 아는 스승과 제자가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눈 밝은 스승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이 문답에서 보듯이 <조주록>이 모두 격식을 벗어난 선구들로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조주록> 전반부에서 보았듯이, 조주 스님은 젊었을 때는 한 틈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는 선기로 가득하였었지만, 노년 <조주록>을 기록할 때쯤에는 때로는 쉬운 대담으로 혹 때로는 어려운 선적인 대담을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납자들을 교화하였다. 백세를 넘겨 살면서 수많은 납자를 접하였던 조주 선사는 납자들의 근기에 맞는 각각의 방법으로 대담에 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범한 진리도 선적인 비유를 들어 대담한 것이 있고, 간혹 몇 단계를 생략한 언어로 대담한 것이 있다. 물론 고준한 뜻이 담겨있는 선구를 보인 것도 있다. 따라서 선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주록>은 선의 비유나 선적인 뉘앙스를 이해하는 것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뜻이 있는 납자들에게 <조주록>은 식지 않는 인기 선서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글쓴이 : 무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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