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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은 있는데 발자국은 없다
왕과 신하는 다르고, 부귀와 빈천이 다르고, 사람과 짐승은 다르다. 그러나 중생과 범부는 같고 부처와 성인이 같고 원숭이와 개는 비슷한 무리이다. 이것이 이(異)와 유(類)의 의미이다.『조주록』에서 다른 것과 비슷한 무리에 대한 남전 스님과의 선문답이 나온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다른 것(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것(類)은 무엇입니까?” 남전 스님은 두 손으로 땅을 치고 기어가는 자세를 취하였다. 조주 스님은 곧 밟아서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열반당에 돌아가서도 계속 “후회가 돼. 후회가 돼.”하고 외쳤다. 남전 스님은 그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후회가 된다는 말인가?” “덤으로 한 번 더 밟아버리지 버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돼.”
師問南泉 異卽不問 如何是類 泉以兩手托地 師便踏倒 卻歸涅槃堂內叫 悔悔 南泉乃令人去問 悔箇什麽 師云 悔不剩與兩踏
조주 스님은 무엇이 비슷한 무리(類)냐고 물은 것에 대하여 남전 스님은 두 팔과 두 다리로 땅을 짚고 걷는 자세를 취하여 4개의 팔과 다리가 비슷한 무리(類)임을 보여주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므로 틀린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스승의 답이 못마땅하다는 듯 발로 밟아 넘어뜨리고 승당에 돌아가서도 계속 한 번 더 밟아 버리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고 토로하였다.
그렇다면 조주 스님이 기대하였던 유(類)는 과연 무엇일까? 중생과 부처는 원래 없고, 부귀와 빈천도 원래 없고,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것이 유(類)일까? 그렇다면 이것을 선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어찌 되었든 이 납자라면 조주 스님의 유(類)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남전 스님처럼 하지 않고 “발은 있는데 발자국은 없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남전 스님이 욕실 안을 지나다가 욕두(浴頭 : 목욕탕 관리 소임)가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남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욕두 “목욕물을 데우고 있습니다.” 남전 “잊지 말고 수고우(牛)를 불러다 목욕시켜라.” 욕두 “네.” 밤이 되어 욕두가 방장실로 들어왔다. 남전 “무엇 하러 왔느냐?” 욕두 “수고우께서 어서 욕실로 들어가 주십시오.” 남전 “소고삐는 가지고 왔느냐?” 욕두는 대답이 없었다. 조주 스님이 저녁 문안차 들리자,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에게 앞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주 스님이 말하길, 조주 “저에게 한 마디 말(語)이 있습니다.” 그러자, 남전이 물었다. 남전 “소고삐는 가지고 왔느냐?” 조주 스님은 가까이 다가가서 재빨리 코를 잡아끌었다. 남전 “좋기는 좋다만 너무 난폭하구나.”
南泉從浴室裡過 見浴頭燒火 問云 作什麽 云燒浴 泉云 記取來喚水牯牛浴 浴頭應諾 至晩間浴頭入方丈 泉問 作什麽 云請水牯牛去浴 泉云 將得繩索來不 浴頭無對 師來問訊泉 泉擧似師 師云 某甲有語 泉便云 還將得繩索來麽 師便近前驀鼻便拽 泉云 是卽是太麄生
수고우는 일하는 소를 말한다. 잊지 말고 수고우를 목욕시키라는 남전 스님의 말씀에, 욕두는 사원에서 남을 위하여 묵묵히 일하는 소는 곧 방장 스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방장실로 찾아가서 남전 스님에게 “수고우께서 어서 욕실로 들어가 주십시오.”하고 말한 것까지는 나름대로 대범한 선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남전 스님이 “소고삐를 가져왔느냐”고 묻는 것에는 더 이상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지 몰랐다.
욕두처럼 어떤 문제를 알음알이로 풀게 되면 선사가 비슷한 것을 가지고 방향만 약간 틀어서 물으면 전혀 대답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알음알이로 안 것이 아닌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선도(禪道)의 깊은 정점을 깨달으면 전체가 보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마치 고봉에 올라서서 밑을 내려다보듯 모든 것이 선명하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어떤 방장 스님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게 된다.
조주 스님은 소고삐를 가져왔느냐는 질문에 즉시 앞으로 다가가서 코를 잡아끌면서 욕실로 가려는 행동을 보였다. 이 행동은 비록 거칠었지만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의 선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문답에서는 수고우가 방장 스님임이 맞다고 확신하였다면 방장 스님을 욕실로 인도할 수 있는 소고삐도 확실하게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있다.
그런데 수고우를 욕실로 가게 하는 소고삐를 조주 스님은 거칠게 보였지만, 소고삐가 반드시 이렇게 거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거칠지 않은 소고삐는 어떤 것일까? 만일 욕두가 “수고우도 피로를 풀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면 남전 스님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4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百非)를 끊은 경지에 대해서 노스님의 가르침을 주십시오.” 남전 스님은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조주 스님은 말하였다. “이 노스님은 평소에는 말을 잘 하는 편인데도 일단 물어보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단 말이야.” 시자가 말하였다. “노스님께서 대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조주 스님은 시자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師問南泉 離四句絶百非外 請師道 泉便歸方丈 師云 這老和尙每常口吧吧地 及其問著一言不措 侍者云 莫道和尙無語好 師便打一掌
사구백비(四句百非)는 일체 시비논란을 부정하는 말이다. 근본 자리는 그 무슨 말이나 사유도 감히 붙일 수 없으므로 백번을 부정해 들어가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할 때 사구백비라는 말을 쓴다.
사구백비조차 끊어낸 경지에 대하여 남전 스님은 말없이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사구 백비를 끊어낸 행동이다. 선은 이렇게 간결하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답한다. 그러나 조주는 마땅치 않았다. 꼭 이렇게 말이 없어야 하겠느냐면서 혼자 투덜댔다.
조주 스님의 이 투덜거림을 잘 캐치하여야 한다. 조주 스님의 투덜거림은 또한 백비를 벗어난 것이다. 남전 스님의 저러한 행동도 결코 백비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백비를 벗어난 경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시자는 남전 스님을 두둔하고 나섰다. 남전 스님의 행동을 긍정하면 안 된다. 긍정하면 백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시자에게 일장(一掌)을 때린 것이다.
그런데 백비를 벗어난 경지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만약 본 납자에게 묻는다면 “시냇물이 맑으면 물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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