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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줘, 살려줘!
조주 스님이 남전선원에서 노두(爐頭: 불을 관리하는 소임)를 맡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들이 총출동하여 채소를 가리고 있었다. 조주 스님은 승당 내에 있다가 “불이야, 불!” 하고 외쳤다. 대중은 순식간에 승당 앞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승당 문을 닫아버렸다. 대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전 스님이 창으로 열쇠를 던져 넣으니 조주 스님이 문을 쑥 열었다.
師在南泉作爐頭 大衆普請擇菜 師在堂內 叫救火救火 大衆一時到僧堂前 師內關卻僧堂門 大衆無對 泉乃抛鎖匙從窗內入堂中 師便開門
가끔 절에서는 전 대중이 밭으로 나가서 채소를 가꾸거나 뽑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통상 울력이라고 한다. 이때에는 조실이나 방장 스님도 예외 없이 함께 일을 한다. 그런데 마침 대중이 다 모여 있을 때를 틈타서 조주 스님이 불이 났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구하겠느냐고 선적인 행동으로 대중에게 질문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는데, 방장으로 있는 남전 스님이 창안으로 열쇠를 던져 넣었다. 그때서야 조주 스님은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선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사실 평범한 곳에 있다. 불이 났을 때는 응급할 때이다. 응급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차분히 해결책을 찾아야 된다. 해결책을 남전 스님은 열쇠라고 표현한 것이고 조주 스님도 그에 공감한 것이다.
그런데 두 스님이 대중을 모아놓고 왜 이런 쇼를 하느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일깨우기 위함이다. 그냥 앉아서 말로 하는 것보다 이렇게 모두 참여하여 직접 체험하게 되면 그 깨침은 강렬하여진다. 이외의 선서(禪書)에 나오는 선사들의 선적인 행동과 말은 모두 사람을 효과적으로 또는 강렬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다.
현대 사회는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 사회, 교육, 청소년, 빈곤 등이 오늘날 큰 화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는 일은 계속 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법은 법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법이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선(善)하면 법은 많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국가에서 가장 시급하게 하여야 할 것은 사람의 마음을 선(善)하게 만드는 정책을 국가에서 권장하거나 시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선사(禪師)는 인간사 모든 문제에 열쇠를 던져주는 선지식임이 분명하다. 다만 사람들이 그 열쇠를 사용할 줄 몰라서 문제를 푸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조주 스님이 남전선원의 정루(井樓:물 푸는 누각)에 올라가 물을 푸고 있는데 남전 스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조주 스님은 기둥을 끌어안고 다리는 허공에 띄워 흔들면서 소리쳤다. “살려줘, 살려줘!” 남전 스님은 정루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말하였다. “1,2,3,4,5…” 조주 스님은 잠시 뒤 남전 스님에 나아가서 인사를 하였다. “아까는 노스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師在南泉井樓上打水次 見南泉過 便抱柱懸卻脚云 相救相救 南泉上楜梯云 一二三四五 師少時間 卻去禮射云 適來謝和尙相救
조주 스님은 정루 위에서 한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남전 스님이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 그것을 알기 위하여 위기상황을 연출하였다. 여기에 대한 남전 스님의 대처 방법은 신속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이었다.
즉,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선사(禪師)라 하여도 신속하게 움직여서 그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평범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더 덧붙여 위험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특별함이었다. 즉, 남전 스님은 정루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발이 사다리 하나를 밟을 때마다 입으로 하나, 둘, 셋, 넷, 다섯 … 하고 외치면서 구원의 손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안심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자비행이고, 이것은 조주 스님에게 평생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삼풍사건이 일어났을 때 단 3명이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살아났다. 모두 불자였다. 그 중에 한 불자가 암흑 속에 갇혀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적막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 멀리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침 마다 수험생 옆에서 학부모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하는 소리를 들려주면 그 수험생은 실제 학업에 능률이 오른다. 관세음보살에 무슨 뜻이 있는지, 왜 불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염불하는 것 그 자체가 중생구원의 자비행 실천이다.
남전선원의 동당 스님들과 서당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다투고 있었다. 남전 스님이 당내에 들어가서 고양이를 들어 올리고 말하였다. “이른 즉 죽이지 않겠으나 이르지 못한 즉 죽이겠다.” 대중이 여러 말을 하였지만 모두 남전의 뜻에 맞지 않았으므로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저녁에 조주 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와 귀가 인사를 드리니, 남전 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면서 “그대라면 어떻게 고양이를 구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조주 스님은 집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갔다. 남전 스님은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구하였을 것인데…”하고 말하였다.
南泉東西兩堂爭猫兒 泉來堂內提起猫兒云 道得卽不斬 道不得卽斬卻 大衆下語皆不喫泉意 當時卽斬卻猫兒了 至晩間師從外歸來問訊次 泉乃擧前話了 云 你作麽生救得猫兒 師遂將一隻鞋載頭上出去 泉云 子若在救得猫兒
이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 화두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있지 않는 맑은 것이라 공연히 여기에다 이러니저러니 사족을 달면 점점 더 진흙탕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고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 진다. 화두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혹 비유로도 대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이 화두는 직접 화두를 들고 체험하여야 알 수 있다.
참선은 마음을 푹 쉬어서 편안한 상태로 해야 한다. 세상에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대부호의 마음처럼 되어 편안하게 화두를 들어야 한다. 구하려는 욕망으로 가득하여 마음이 가난하면 절대 알 수 없다. 부자의 마음으로 넉넉한 상태에서 이 화두를 들고 있으면 일체 망상이 달라붙지 않을 것이다. 선악시비가 떨어져나가고 헤아리려고 하여도 더 이상 헤아릴 수 없는 고요한 마음에 돌아간다. 그때 문득 이 화두의 답이 드러날 것이다. 뜻이 드러나도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그때서야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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