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조주 선사는 남전 스님의 밑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시기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18세 전후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조주록』첫 장에서는 남전 스님과의 대화중에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에 깊은 뜻(玄旨)을 돈오(頓悟)하였다고만 기록되어있을 뿐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무엇이 도입니까?” 남전 “평상심이 도이다.” 조주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도 좋습니까?” 남전 “헤아린즉 어그러진다.” 조주 “헤아리지 않고 어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 “도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각(妄覺)이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記)이다. 만일 참으로 헤아림이 없는 도에 도달하면 마침내 허공과 같아 말끔하게 트인 것이다. 어찌 가히 무리하게 옳다 그르다 하겠느냐.” 조주 스님은 언하(言下)에 깊은 뜻(玄旨)을 깨닫고(頓悟) 마음이 마치 밝은 달과 같아졌다.
師問南泉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師云 還可趣向不 泉云 擬卽乖 師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太虛 廓然蕩豁 豈可强是是非也 師於言下 頓悟玄旨 心如朗月
평상심은 선악시비 분별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선악시비로 마음이 들끓을 때는 평상심이 아니다. 아무 일이 없어 고요할 때가 평상심이다. 평상심은 평소 마음이다. 도는 원래 그렇게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헤아림이다. 도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다. 도는 알고 모름과도 전혀 상관없다. 앎은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다만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일 뿐이다. 모름은 전혀 기억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알고 모름이 도이겠는가. 만일 마음이 헤아림이 없고 알고 모름에 유혹되지도 않는다면 그 자체가 태허공과 같아서 확연히 트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도를 행하고 있다. 다만 마음이 선악시비에 이끌려 갈 때는 도가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도를 행함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이 더 이상 무엇을 찾지 않고 선악시비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되고 유혹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행복과 불행을 만드는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아들었다면 당신은 곧 돈오(頓悟)한 것이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마라. 그대 자신은 원래 부처이고 행복하다.
『조주록』앞 부분에는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선문답이 나오므로 본『조주록』선해에서도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선문답을 먼저 소개하도록 한다.
남전스님이 법당에 올라가자, 조주 스님이 물었다. 조주 “밝음에 합합니까, 어둠에 합합니까?” 남전 스님은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조주 스님은 곧 법당을 나와서 말하였다. 조주 “저 노스님이 나의 질문을 하나 받고 곧바로 할 말이 없었던 거야.” 수좌(首座)가 말하였다. 수좌 “노스님께서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그대 자신이 모를 뿐이다.” 조주 스님은 즉시 수좌를 때리고 말하였다. 조주 “이 방망이는 당두(堂頭)이신 저 노화상이 맞아야 하는 것인데.”
南泉上堂 師問 明頭合暗頭合 泉便歸方丈 師便下堂云 這老和尙 被我一問 直得無言可對 首座云 莫道和尙無語 自是上座不會 師便打 又云 這棒合是堂頭老漢喫
밝음이 기쁨이라면 어둠은 근심이다. 밝음이 희망이라면 어둠은 절망이다. 밝음이 부처라면 어둠은 중생이다. 밝음이 부귀라면 어둠은 가난이다. 세상사는 이렇게 양 쪽의 가치에 얽매여있다. 그런데 밝음과 어둠은 본래 없는 것이다. 밝음과 어둠은 사람들이 정하여 놓은 허망한 가치이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양변에 유혹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현재 법당에 올라왔을 때 이것을 밝음이라고 해야 할까,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을 받았을 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대답이 될까? 도를 깨달은 선사라면 이때 어떻게 할까? 남전 스님은 말없이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말없이 돌아간다 하여도 결국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 노화상이 주장자 일방을 먹어야 할 당사자라고 일성을 날린 것이다.
이 선문답은 2중 3중의 그물이 쳐져 있어서 좀처럼 그 그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 선문답을 보고 조주 스님의 최후 일성이 맞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2중의 그물은 벗어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주의 주장자를 면할 것인가? 만일 이 납자에게 밝음과 어둠을 묻는다면 조주 스님에게 즉시 일방(一打)을 날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본 납자는 3중의 그물에 걸린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적토마를 타고 곧장 달려가 정봉에 깃발을 꽂겠는가?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불법을 아는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갑니까?” 남전 “산 밑 시주 집의 한 마리 소(牛)가 된다.” 조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전 “지난 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고 있었어.”
師問南泉 知有底人 向什麽處去 泉云 山前檀越家 作一頭水牯牛去 師云 謝和尙指示 泉云 昨夜三更月到窗
지유저인(知有底人)을 직역하면 ‘있음을 아는 사람’인데, 도를 아는 사람, 불법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안다(知)는 것은 단순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깊이 아는 것을 말한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도를 아는 사람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여기에 대하여 남전 스님은 사람들의 소가 된다고 말한다. 소는 주인을 위하여 묵묵히 일한다. 밭을 갈고, 수레를 끌어 물건을 나른다. 소는 말이 없고 힘들어도 불평이 없다. 불평이 없고 말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 같지만 없어서 안 될 것이 소이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수행자는 한낱 평범한 소처럼 산다. 권위가 없고 형식이 없으며 따로 불교라는 테두리도 두지 않는다. 몇 명이나 도움을 받을지 생각하지도 않고 묵묵히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헌신할 뿐이다.
지난 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추고 있었다는 말은 진작 자네의 그릇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선사는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바로 알아들으니, 자네 참 훌륭하구먼.’ 하고 말하는 방식은 선가의 말이 아니다. 선(禪)은 절대 단정(斷定)하지 않기 때문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