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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형제들이여,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면 삿된 법이 사람을 따라서 바르게 된다. 그릇된 사람이 정법(正法)을 설하면 정법도 그 사람을 따라서 그릇되게 된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는 어렵지만 알기는 쉬우나, 나의 이곳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
兄弟正人說邪法 邪法亦隨正 邪人說正法正法亦隨邪 諸方難見易識 我者裡易見難識
사람이 문제이지 정법과 사법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나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 부자(附子)는 원래 사람을 해치는 독약이지만 의사의 손을 만나 법제를 당하면 냉병을 다스리는 훌륭한 약이 된다. 조주 스님은 사람이 바르다면 사법(邪法)도 사람을 위하는 법으로 바뀌어 버리므로 바른 사람에게는 정법 사법을 특별히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설법이 매우 흥미롭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는 어려워도 알기는 쉽지만, 조주 스님의 법석에서는 보기는 쉬워도 알기는 어렵다고 말한 부분이다. 선(禪)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이나 도를 보는 것을 말한다. 일명 견성(見性)이다. <조주록>에서도 끝없이 강조하고 있지만, 조주 선사는 바로 봄을 목적으로 설법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약간의 이해 능력만 있다면 조주의 설법을 듣고 도(道)나 자성(自性)을 즉시 봐버리고 만다. 그래서 조주 선법은 보기 쉽다. 그러나 교묘하고 그럴 듯한 지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도는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도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오로지 한번 봐버림으로서 모든 것에 통하게 하려는 것이 조주의 선법이다.
학승이 물었다.
“선(善)도 악(惡)에도 유혹되지 않는 사람을 독탈(獨脫)이라 해야 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독탈(獨脫)하지 못한 거야.”
학승이 물었다.
“어찌하여 독탈(獨脫)하지 못한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선악 속에 있기 때문이야.”
問 善惡惑不得底人 還獨脫也無 師云 不獨脫 學云 爲什麽不獨脫 師云 正在善惡裡
궁극적인 도의 경지는 선악에 유혹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한결같이 선악에 유혹되지 말라고 말하였다. 선과 악은 어느 쪽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선악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악은 시대적인 상황과 당시의 피해 정도를 보고 ‘악’이라고 규정하여 말하나, 어느 때는 악이 선이 될 수 있다. 진정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선악에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유혹되지 않는다면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설사 선악에 유혹되지 않는다하여도 해탈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딱 부러지게 단정하고 있다. 선악을 떠난다하여도 아직 선과 악의 경계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주 스님의 이 사상은 부처님의 <금강경>사상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금강경>의 사상대로라면 선악을 떠났다는 생각도 떠나야 진정한 떠남이다. 즉 마음 깊은 곳에서도 선악을 떠났다는 생각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개념도, 이름도, 떠났다는 생각도 철저히 없어야 떠남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선악 속에 있는 것이 된다.
한 비구니가 물었다.
“이제까지 가르쳐주신 것을 떠나서 화상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혀를 차면서 말하길,
“주전자가 탄다.”
니승은 주전자에 물을 따라 붓고 다시 말하였다.
“화상께서 제발 대답해주십시오.”
조주 스님은 “하하”하고 웃었다.
尼問 離卻上來說處 請和尙指示 師咄云 煨破鐵甁 尼將鐵甁添水來 請和尙答話 師笑之
선사는 질문에 대하여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기 때문에 전광석화와 같은 명석한 머리로 즉시 알아들어야 한다. 이 선문답도 이제까지 내려 주신 가르침을 제외하고 좀 다른 가르침을 달라고 한 것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질문하자마자 바로 답이 나갔다. 그것은 “주전자가 탄다”라는 말이다.
선사가 말한 의도를 어려운 곳에서 찾으면 안 된다. 선은 항상 일상사에 답이 있다. 조주 선사는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 불교의 핵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조주 선사는 "특별함은 없어. 있다면 '주전자가 탄다'는 것과 같은 것들뿐이야." 라는 의미이다. 주전자를 너무 오래 달리면 탄다는 말이야 말로 이제까지 조주가 말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세계가 변하여 암흑이 된다면 그때 이 몸은 어느 길로 떨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그런 것은 점치지 않아."
학인이 물었다.
"점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였다.
"밭가는 노예야."
問 世界 變爲黑穴 未審此箇落在何露 師云 不占 學云 不占是什麽人 師云 田庫奴
태양이 식어 암흑이 된다면? 세계가 불바다가 된다면? 지구가 무너진다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것에 대하여, 혹 스님은 정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사는 그러한 것과 무관하다. 혹은 스님을 신통한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수행자는 신통과도 무관하다.
불교는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 무너진다는 절대적 진리를 설하고 있다. 따라서 지구도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 자기중심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구가 무너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가 무너지는데 사람인들 어떻게 제대로 보존되겠는가? 불교는 그러한 때에 어떤 부처님이 혜성처럼 나타나 중생을 구원하여 다른 안락의 세계로 데려간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구도 멸망하고 사람도 반드시 죽는다. 이러한 절대적 법칙 속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지금 현재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가 불교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조주 스님이 자신을 밭가는 노예로 표현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조주 스님은 적어도 총림의 방장이고 나라에서 나이가 가장 연로한 스님이므로 대내외적으로 부처님 이상 가는 존경과 존칭이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선사 스스로는 나는 일개 '밭가는 노예'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에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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