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26 (100809) 큰 난리가 닥쳐온다면 어떻게 피하여야 할까

희명화 2015. 4. 8. 21:34



법당에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불경을 읽는 것도 생사 속에 있는 것이고, 경을 읽지 않는 것도 생사 속에 있는 것이다. 자, 그대들은 어떻게 하여 생사 밖으로 나올 수 있겠는가?"
어떤 학승이 즉각 말하였다.
"다만 그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좋겠지만, 만일 진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생사를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上堂云 看經也在生死裡 不看經也生死裡 諸人且作麽生出得去 僧便問 只如俱不留時如何 師云 實卽得 若不實卽得生死

깊고 깊은 경지로 말한다면 불경을 읽는 것도, 참선을 하는 것도, 중생을 제도하여 복을 짓는 것도 모두 생사를 면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불경을 읽지 않고 참선도 하지 않는 이것은 더더욱 생사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고 죽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학인은 어느 쪽에서도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은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양자 속에 포함되지 않을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에 머물지 않는 것이 진실로 가능한 일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대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주 스님은 이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납자들은 한 번 생사를 벗어나는 견해를 밝혀보길 바란다. 한 생각 떠오르는 기막힌 대답이 있으면 즉시 선사를 찾아가서 점검하길 바란다. 이 납자에게 묻는다면 즉시 어떤 한 행동을 해서 벗어나겠지만 그것은 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기술하도록 하겠으나, 조주 스님의 질문을 평한다면 "조주 스님의 그물은 촘촘해서 여간하여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겠다.

학승이 물었다.
"예리한 칼날 끝이 잘 들을 때는 어떠합니까? "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나야 말로 예리한 칼이지만 잘 든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問 利劍快時如何 師云 老僧是利劍 快在什麽處

칼이 잘 들을 때는 마음이 잘 조정될 때에 비유한 것이다. 마음이 흰 소처럼 잘 길들여져서 화나는 일이 닥쳐와도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시비를 걸어와도 무덤덤하고, 물질을 보아도 욕심이 일어나지 않고, 미움, 시기, 근심, 우울함도 없는 참으로 막힘이 없고 자유로운 경계이다.

잘 드는 칼은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제도함에 적합한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선사의 할이나, 어떤 비유, 그리고 선적인 행동은 도에 대하여 완전히 사무쳐 있지 않으면 절대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선사들은 대개 하고 싶은 대로 중생의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므로 '잘 드는 칼(利劍)'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조주 스님은 스스로를 잘 드는 칼이라고 거침없이 말하였다. 평생 마음을 다스려온 노승이라, 이제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뿐더러, 중생의 마음을 요리하는 것에도 전문가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조주 스님은 그렇지만 내 검이 잘 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 드는 것인지, 나의 법문과 선적 지시가 중생에게 유용하게 어필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선지식이라면 중생을 제도하여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능숙한 경지에 대해서도 절대 자랑이 없어야 한다. 무엇을 해도 무엇을 보아도 무엇이 다가 와도 마음이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고 말끔하여야 하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큰 난리가 닥쳐온다면 어떻게 회피해야 하겠습니까? "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마침 잘 됐어.(恰好)"
問 大難到來如何回避 師云 恰好

흡호(恰好)는 '마침 잘 됐어.' '음, 좋아.' '맞아 맞아, 맞는 말이야.' 등의 의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마침 잘 됐어!'라는 뜻으로 본다.

이것은 조주 스님의 선적 그릇(禪器)을 알아 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대부분 난리가 닥쳐온다면 잔득 근심을 품고 피하는 것에 급급할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이 난리를 좋은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난리가 나면 대부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지구의 기상 이변은 멀지 않아서 곧 지구의 종말이 다가올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다. 이러한 때에 선(禪)을 닦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자세로 난리를 맞이하여야 할까에 대한 조주 선사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생사는 본래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로 이것을 알고 있는 것하고 막상 죽음이 닥쳐왔을 때 하고는 전혀 다른 기분에 젖어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닥쳐온다면,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면…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차분하게 마음을 점검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인생이 한 낱 꿈에 불과한 것인데, 이 죽음에 마음이 동요된다면 내가 아직도 진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혹 깨닫지 못하였다하여도 죽음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하여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사도 없고,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는 것이다. 이 기회에 이제라도 이 진리를 깨닫고 죽음을 맞이하자… 하면서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주 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마음이 생하면 여러 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여러 가지 법이 멸하는 것이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자 한 학승이 물었다.
"다만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과 같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였다.
"나는 자네의 그 일문(一問)을 허락하겠네."

師示衆云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你諸人作麽生 僧乃問 只如不生不滅時如何 師云 我許你者一問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은 부처님의 법문이다. 마명보살이 <대승기신론>에서도 이 말을 하였다. 조주 스님이 이 법문을 대중에게 설법하면서 대중의 의견은 어떠한가 물은 것이다.

질문을 허락하겠다고 하는 것은 질문이 '적합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 당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본래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이다. 눈앞에 무엇이 보여도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없어졌다하여도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이 진실이다. 그러한데 도대체 무엇이 무엇을 생하고 멸하게 한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그 질문 자체만 가지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야, 맞아." 하고 긍정한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cafe.daum.net/mubulsunwon)

 

 

 

 

 

 

 

 

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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