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

[스크랩] 조주록강의 29 (100831) 그대 아버지는 얼굴을 내밀지 않아

희명화 2015. 4. 8. 21:35



학승이 물었다.
"실제리지(實際理地)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한 번 더 청(請)해보아라."

問 若是實際理地什麽處得來 更請闍黎宣一遍

만물은 일정한 법칙에 의하여 생성되고 파괴된다. 인간사 모든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법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근원을 법칙(法)이라고 본다. 우주는 법칙에 의하여 생성되고 파괴된다. 조물주는 신(神)이 아니고 법(法)이다. 그 법의 속성을 법성(法性)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만물을 지켜보고 법에 의하여 생성되고 파괴된다는 것을 아는 자도 또한 자성(自性)이요, 법성(法性)이다. 법성에서 만 가지 이치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니 사람의 자성이 우주의 이치를 토해내는 것이다. 법성을 또 다른 말로 실제리지(만법이 나오는 근원)라고 부른다.

실제리지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의 근본으로 돌아간 사람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간 것, 부처를 회복한 것 등을 실제리지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리지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독자들은 지금 당장 "실제리지(實際理地)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큰 소리로 물어보아라. 이 말을 할 때 깨달으라. 이 소리를 내는 자가 바로 실제리지임을.

학승이 물었다.
"만 가지 경계가 일시에 일어나 닥쳐와도 유혹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있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유혹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불법이 있음을 믿고 있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불법이 있음을 믿는 일은 옛사람이 이미 말해 마쳤습니다. 무엇이 유혹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는가?"
학승이 말하였다.
"이미 물었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이 유혹된 것이니라."

問 萬境俱起還有惑不得者也無 師云 有 學云 如何是惑不得者 師云 你還信有佛法否 學云 信有佛法古人道了 如何是惑不得者 師云 爲什麽不問老僧 學云 問了也 師云 或也

만 가지 경계에 유혹되지 않는다면 이미 성인의 경지를 얻은 것이다. 갖가지 사상, 이념, 감정, 가치 등은 진실의 세계에서는 다 허망한 정의일 뿐이다. 따라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경계에도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학승은 조주 스님에게 '유혹되지 않는 것'을 직접 물어보았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분명 물음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학승의 물음을 못들은 듯 "왜 나에게 물어보지 않는가?"하고 재촉하였다. 학승의 질문에조차도 유혹되지 않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학승은 "이미 물었지 않습니까?"하고 조주 스님의 질문에 유혹당하여 마치 항변이라도 하듯 반문한 것이다. 조주 스님의 질문에 따라가 이러니저러니 마음에서 분별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유혹당한 것이다. 선사의 대답은 즉석에서 순식간에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정답인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학승이 물었다.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가까운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가깝기는 가깝지만 일체(一切)는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어찌하여 같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법신은 설법하지 않기 때문이야."
학승이 말했다.
"법신은 설법하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지금 화상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혜(惠)속에서 대답하고 말하는 거야."
학승이 말했다.
"그러시면서 어찌 법신은 설법하지 않는다고 말하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혜(惠)속에서 그대들의 아버지를 구해주지만 그는 얼굴을 내밀지 않기 때문이야."

問 未審古人與今人 還有近也無 師云 相近卽相近 不同一切 學云 爲什麽不同 師云 法身不說法 學云 法身不說法 和尙爲人也無 師云 我向惠裡答話 學云 爭道法身不說法 師云 我向惠裡救你阿爺 他終不出頭

여기서 옛사람(古人)은 역대 선지식을 말한다. 법신은 법을 설하는 몸을 말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법을 설하면 법신이다. 여기서 법신은 살아있는 오늘날 사람이다. 역대 선지식들은 많은 설법을 남기고 죽었다. 오늘날 후학들은 그 설법을 듣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조주 스님은 옛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설법을 남기고 갔지만 오늘날 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설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옛사람과 오늘날 사람들은 가깝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학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재차 물은 것이다. 노스님께서 지금 그렇게 설법하고 계시면서 어찌 설법하지 못한다고 하느냐는 반문인 것이다.

조주 스님은 분명히 말하였다. 다만 나는 저 옛사람들의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설법하고 있지만,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만 구원을 받은 자는 없기 때문에 설법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의 사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는 이렇게 평생 중생을 구원하지만 구원받는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상의 겸손이다. 이런 선사들이 지상 위에 가득해야 이 세계가 좀 살아 볼만한 곳이 된다.

그대들의 아버지는 사람들의 본질을 말한다.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다. 자성은 형체가 없어서 이름도 없고 성도 없다. 찾으려하면 숨어버려서 더욱 찾지 못한다. 영원히 얼굴을 내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자성을 깨달아 알 수는 있다.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無不禪院 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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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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