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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마음이 아니면 지(智)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화상의 일구(一句)를 부탁드립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자네 뒤에 떨어져 있네.”
問 非心不卽智 請和尙一句 師云 老僧落你後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지혜라고 할 수 없다. 지(智)는 지(知)와 다르다. 지(知)는 지식이고 지식은 머릿속에 저장한 데이터일 뿐이다. 지식은 중요한 순간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예컨대, 분노가 일어나면 자비라는 글자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지(智)는 지식이 자기화 된 상태이다. 일명 진심이 들어있는 지혜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절대 아니다. 지식은 없어도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조주 스님 역시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표현이 매우 겸손하다. “노승은 자네 뒤에 떨어져 있네”라고 말한 것은 “자네가 나보다 낫군”이라는 말이다. 후배라 하여도 맞는 말이면 적극 칭찬해주는 정신이 선사의 정신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필경(畢竟)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필경이다.”
학승이 말했다.
“어떤 것이 필경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이 필경이다. 자네는 질문할 말을 알지 못하는구나.”
학승이 말했다.
“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필경은 어느 곳에 있는가?”
問 如何是畢竟 師云 畢竟 學云 那箇畢竟是 師云 老僧是畢竟 你不解問者話 學云 不是不問 師云 畢竟在什麽處
필경(畢竟)은 ‘마지막’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마쳐지는 곳이 있다. 선(禪)도 궁극의 경지가 있고, 인생도 끝마쳐지는 곳이 있다. 학승이 물은 것은 다만 필경에 대한 뜻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조주 선사는 짧게 ‘필경’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면 당연히 다른 질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학승은 어떤 것(那箇)이 필경이냐고 또 물었다. ‘무엇’이나 ‘어떤 것’은 비슷한 질문이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네가 질문할 말을 찾지 못했구나” 하고 조주 선사가 대신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필경은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 뒤에 이렇게 다시 물었다면 제대로 된 질문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학승이 제대로 질문 하는 법을 알아서 “필경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조주 선사는 어떻게 대답하였을까? 본 납자에게 필경이 있는 곳을 묻는다면 “스산한 바람도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걸치지 않은 것인가?”
학승이 말했다.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는 것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매우 훌륭한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음’이구나.”
問 不挂寸絲時如何 師云 不挂什麽 學云 不挂寸絲 師云 大好不挂寸絲
여기서 ‘한 치의 실’은 욕심을 말한다. 비구는 조금도 자기의 소유가 없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무소유이다. 부처님은 누가 출가하면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소유물을 가지지 말라하였다. 다만 6물(가사 3벌ㆍ물병ㆍ발우ㆍ주장자)은 허락하였다. 이런 무소유의 정신은 출가의 본뜻에 부합하므로 부처님 제자는 이것을 철저히 지켜야 감히 불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북방 불교에 와서는 겨울에 곡식을 심을 수 없고 탁발하기도 힘든 상태라 부득이 곡식을 저장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적당한 정도의 곡식 비축은 허락되었다. 지리적인 조건에 의하여 북방에서는 약간의 소유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출가의 뜻에 반하는 정도의 비축까지 허락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혹시 재물이 쌓이면 적당량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톨의 곡식도 자기 이름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만약 수행자가 이렇게 한다면 매우 훌륭한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자기의 머리가 불타고 있는 것을 구하듯 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문득 배우라.”
학승이 말했다.
“무엇을 배웁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問 如救頭燃底人如何 師云 便學 學云 什麽處 師云 莫占他位次
사람이 머리에 불이 붙으면 가장 먼저 머리 위에 불 끄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그처럼 옛 조사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로 자기에 대한 ‘깨달음’을 꼽았다. 깨달음은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바라고 강조한 것이다.
학승은 여구두연(如救頭燃)에 대한 조주 선사의 견해가 궁금하여서 물어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주 스님도 적극 찬성하였다. 만일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당장 달려가서 배우라는 것이다. 부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부처의 심성을 가지고 나온 위대한 자가 자기를 잃고 전혀 다른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의 정체성을 알면 즉시 일평생 편안함을 얻는다. 명예를 얻는 일보다, 돈을 버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이 일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선지식을 만난다면 육조 스님처럼 하루 밤 만에도 가능하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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