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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佛)이고 마음(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는 마음이고 나는 부처야. 받들어 모시고 모시지 않는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라.”
학승이 말했다.
“스승은 없지 않으나, 받들어 모실 수야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럼, 네가 나를 교화해 봐.”
問 如何是佛心 師云 你是心我是佛 奉不奉自看 學云 師卽不無 還奉得也無 師云 你敎化我看
『화엄경』에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고 하였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같다는 말이다. 학승이 부처와 마음에 대하여 물은 것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누구든지 중생을 교화하면 그가 곧 부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중생이 곧 부처이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길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곧 부처이다. 좋은 선생을 부처로 존경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선문(禪門)의 뜻이다.
조주 스님은 법왕의 칭호에 대해서는 나는 법왕이 아니라고 한 없이 겸손함을 보였지만 부처라는 칭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스스로 부처라고 말했다. 마음에 차별심이 없으면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개의치 않는 법이다. 조주 스님은 스스로에 대하여 때로는 ‘밭가는 노예’ 라고 하였고, 때로는 ‘수고우(밭가는 소)’라고도 하였지만, 여기서는 스스로 ‘부처’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우주가 나이고 내가 곧 우주이다. 조주 스님은 ‘나’를 무엇이라 부르건 상관없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법신ㆍ보신ㆍ화신 삼신불 중에 어느 것이 본신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나라도 빼먹으면 안 된다.”
問 三身中那箇本來身 師云 闕一不可
부처님은 일신(一身)이면서 다신(多身)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한다. 부처님이 하는 일을 3가지로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 삼신불이다. 법신은 법성신이고 진리의 당체이다. 보신은 중생이 원하면 언제라도 나타나서 구원하여 주는 부처이다. 화신은 중생의 교화교육을 담당하는 부처이다. 석가모니불은 화신불이다. 삼신이지만 크게 보면 하나의 부처이다.
삼신 중에 어느 것이 본신일까? 이것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람도 여러 일을 하듯 부처님도 많은 일을 한다. 그 중에 하나를 들어서 이것이 본신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곧 본신이고, 보신이 곧 본신이고, 화신이 곧 본신이다. 하나라도 빼 먹으면 부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삼신이 곧 본신이고, 우주가 곧 본신이다.
학승이 물었다.
“이 땅에서는 누가 조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달마가 온 이후로 이 땅은 모두 다 조사이다.”
학승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몇 대 조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서열에 들어가지 않아.”
학승이 물었다.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귓속에 있어.”
問 未審此土誰爲祖師 師云 達磨來這邊總是 學云 和尙是第幾祖 師云 我不落位次 學云 在什麽處 師云 在你耳裡
선(禪)은 부처님으로부터 6조 혜능까지 한 사람이 대표가 되었다. 그러다 혜능 스님 이후로는 여러 사람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이 땅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조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혜능의 손자가 되는 마조 스님은 여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제자는 서당ㆍ남전ㆍ백장이다. 마조 스님이 말하길, 선(禪)은 백장으로 이어가지만 이 중에서 남전이 홀로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다. 조주 스님은 그 남전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당연히 육조 혜능 계열의 조사이다.
그러나 조주 스님 본 문답에서 자신은 서열이 없다고 하였다. 철저히 선적 대답을 한 것이다. 위도 아래도 없고 시간도 없는 법인데, 거기 무슨 서열이 있겠느냐는 뜻이다. 과연 선사다운 답변이다. 요즘 앞 다투어 큰 스님의 인가를 받았다고 세상에 공표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번 음미해볼 만한 대담이다.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하고 묻는 말에, “자네 귓속에 있어.”라고 대답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본 <조주록> 초반 행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었는데, 계류의 찬 물을 마실 때는 어떠한가 묻는 말에 “콧구멍으로 들어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말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본 납자가 사족은 달면 다음과 같다. “그곳은 너무 넓어서 주객(主客)이 보이지 않는다.”
학승이 물었다.
“극히 적은 차이(差異)가 있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로 벌어진 거야.”
학승이 말했다.
“극히 적은 차이(差異)도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로 벌어진 거야.”
問 毫釐有差時如何 師云 天地懸隔 云 毫釐無差時如何 天地懸隔
부처의 경지에 완전히 다가간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근접해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여기에 대하여 조주 스님은 약간의 차이라도 나면 천지현격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저히 도(道)에 근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차이도 나지 않을 때는 어떠할까? 즉, 부처의 경지와 똑같아진 것이라면 어떠할까? 여기에 대해서도 조주 스님은 역시 천지현격의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왜일까? 도(道)는 벌어진 것도 없고 같아진 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다, 다르다 말하지 말라.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면 천리만리 어긋난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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