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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물었다.
"명(明)상좌가 대유령에 쫓아가 6조를 만났는데 어찌하여 가사를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까?"
조주 스님이 학인의 가사를 집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것을 어디에서 얻어왔느냐?"
학승이 말했다.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 올릴 수 없는 거야."
問 大庾嶺頭趁得及 爲什麽提不起 師拈起衲衣云 你甚處得者箇來 學云 不問者箇 師云 與麽卽提不起
육조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 스님의 방에 찾아가서 하룻저녁 <금강경> 설함을 듣고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그야말로 돈오(頓悟)이다. 이에 홍인 스님은 혜능의 깨달음을 증명해주기 위하여 자신이 쓰던 가사와 발우를 주면서 남쪽으로 내려가 선법(禪法)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였다.
혜능이 대유령에 이르자, 홍인 스님의 또 다른 제자 혜명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가사와 발우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혜능은 곧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올려놓았는데, 혜명이 아무리 들어 올리려하여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혜명은 마음을 바꾸어 예의를 갖추고 불법을 물었다. 혜능이 설법하여 주었는데 혜명은 언하에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주 스님이 가사를 들어 올리면서, "이것을 어디에서 얻어왔느냐?"고 물은 것은 가사가 나온 근원지를 물어보므로 해서 질문한 것을 스스로 알게 해주려고 한 것이다. 누군가 가사를 주었을 것이고, 주는 그 마음이 어느 곳에서 나온 것인가 묻는 것이다. 이렇게 간혹 선문답에서 어떤 장소를 물을 때는 대부분 근원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학승이 선적 질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은 곧 가사가 나온 곳을 모른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가사를 들어 올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의 가사는 가사가 나온 곳을 아는 제자만 물려받을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스승의 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것이 선문의 규칙이다. 이러한 엄격한 불법을 잘 알고 있는 혜명이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어찌 홍인 스님의 가사와 발우를 들어 올릴 수 있었겠는가?
학승이 물었다.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에게도 그것이 하나 있고 나에게도 하나 있어."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합(合)입니다. 어떤 것이 산(散)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네가 합(合)하는 거야."
問 不合不散 如何辨 師云 你有一箇 我有一箇 云 者箇是合 如何是散 師云 你便合
불합불산(不合不散) 즉,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것은 자성(自性)을 말한다. 중생의 본자성(本自性)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자성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가지고 있다.
여기에 나온 학승은 약간 선적 견지가 있는 사람이다. 조주 스님이 "너에게도 그것이 하나 있고 나에게도 하나 있어."라고 말하자,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곧 단정하는 말이 되고 단정은 불합이 아니고 합(合)이라고 말한 것이다. 학승의 이 관점은 일단 긍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합(合)하면 곧 흩어지는 것(散)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이르면 질문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뭐라고 단정하면 합이 되지만, 그렇게 단정하면 동시에 틀려지기도 하므로 그것은 또한 산(散)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합은 곧 산이 되고 산은 곧 합이 된다는 말이니, 이러한 조주 스님의 관점에서 학승은 또 한 수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선(禪)의 모든 진리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부처님의 한 말씀에 귀착된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이 진리는 모든 이론의 초석이다. 이 진리를 마음 깊이 깨닫는다면 인생에 고뇌는 사라진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어긋나지 않는 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마음을 알고 자성을 보는 것이 어긋나지 않는 길이야."
問 如何是不錯路 師云 識心見性是不錯路
식심견성(識心見性)은 종문의 큰 주제이다. 수행자는 가장 먼저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일명 식심(識心)이다. 행복과 불행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만족도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정해진 것은 없다. 특히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마음의 진리를 크게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자성을 보아야 한다. 일명 견성(見性)이다. 수많은 마음이 나오는 곳은 근본 성품, 즉 자성(自性)이다. 자성은 만물의 근원이면서 인간사의 근원이다. 자성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성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은 업식이 강하여 자성을 보기도 어렵고 확철대오(確哲大悟)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성을 보고 깨달으면 사람이 순간 바뀌어 진다. 중생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으로 바뀌고, 그동안 고치지 못한 악습을 한 순간에 끊어내 버린다. 그래서 모든 선사들이 한결같이 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식심견성하는 것, 이것은 인생을 어긋나지 않게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다.
학승이 물었다.
"밝게 빛나는 구슬이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빛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비추는 일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도대체 무엇이 구슬이라 하는가?"
問 明珠在掌 還照也無 師云 照卽不無 還什麽作珠
빛나는 보배 구슬을 손에 쥔 것도 좋지만, 무엇이 '명주'라고 부르는지 그 주인공을 알려고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혹 명산을 찾아가서 유람할 때가 있다. 아름다운 산을 보면 자연의 신비에 경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 속에 누가 있어서 감탄하는가? 항상 그것을 알아내보려고 해야 한다. 혹은 상을 타거나,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으면 그 순간 누가 있어서 이렇게 기뻐하는지 그것을 알아내보려고 해야 한다.
자성을 말(馬)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다니면서도 말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바보가 없을 것이다. 말을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말을 타고 있으면서도 말을 보지 못하고 있으면 장님의 인생과 같기 때문이다. 언제 추락할지, 장차 어떻게 말을 몰아야할지, 앞에 위험한 낭떠러지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고 말을 몰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아는 것, 그것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과제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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