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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승이 말하였다.
"신령한 묘(苗)가 뿌리가 없을 때[無根]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어디에서 왔는가?"
학승이 말했다.
"태원(太原)에서 왔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매우 훌륭한 무근(無根)이군."
問 靈苗無根時如何 師云 你從什麽處來 云 太原來 大好無根
여기서 뿌리는 근원을 말하고 묘(苗)는 어린 싹이니, 근원에서 자라난 현상을 말한다. 만일 자성을 뿌리라고 말한다면 묘는 마음의 씀씀이[用]이다. 만일 묘가 우주 삼라만상이라면 뿌리는 우주 삼라만상이 나온 곳을 말한다.
모든 것은 근원이 있다. 근원을 발판하여 모든 현상이 벌어진다. 그런데 우주의 근원은 무근(無根)이다. 무근이 근원이다. 무근에서 삼라만상이 세워졌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즉, 공이 만물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하니 빔 위에서 만들어진 만물이 어찌 신령하지 않겠는가.
선사가 학승에게 온 곳을 묻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 온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장소를 묻는 것이다. 사람의 근원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초학승은 그것을 모르는 수가 있다. 그래서 이 학승은 자기가 온 지명을 댔다. 바로 '태원'이라는 지역 명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학승이 자기가 온 근원은 모르고 있지만 태원(太原)이라는 말은 하고 있으니 이것 매우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그야말로 무근의 신령한 작용이다. 조주 선사는 바로 이 점을 학승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무근? 그것 당연한 것이고, 그것 봐, 매우 훌륭하잖아." 라는 뜻을 학승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제가 부처가 되려고 할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대단히 고생하게 될 거야.”
학승이 말했다.
“고생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된 거지.”
問 學人擬作佛時如何 師云 大煞費力生 不費力時如何 師云 如麽卽作佛去也
하하, 선문에 들어와서 부처가 되려고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도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르려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애석한 것은 금생에 뼈를 깎는 수행을 하다가 부처가 되지 못한다면 다음 생을 기약하겠다고 다음 생까지 헛된 고생을 맹세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두가 참된 스승을 찾지 못해서 생기는 병통이다. 차라리 누더기를 기우면서 세월을 보낼망정 부처가 되겠다는 헛된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학승이 물었다.
“저는 혼돈에 빠져서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 합니다.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학승이 말했다.
“제가 화상께 묻고 있지 않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 도대체 어디에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는 것인가?”
問 學人昏鈍在一浮沉 如何得出 師只據坐 云 某甲實問和尙 師云 你甚處作一浮一沉
혹은 미움이 일어나 분노가 일어나다가 혹은 사랑이 일어나 기뻐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수행자들의 고민이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경계가 닥쳐오면 분별이 생기고 중생의 감정에 휘말리는 것이다.
나의 본성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나의 본성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 나의 본성은 그 무엇에도 유혹되지 않는다. 나의 본성은 항상 고요하다. 나는 항상 편안하다. 나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여전히 눈앞의 경계에 부침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일단 한번 깨달으면 늘 깨어있게 되지만 깨닫지 못하면 습성에 이끌리기 쉽다.
선사의 대담은 학승을 일깨우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조주 스님은 조금의 틈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 지금 이 순간에도 답답해서 부침하고 있잖아. 매순간을 놓치지 말란 말이야.”하고 학승이 부침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부침은 습관이다. 깨달아서 한 번에 습성을 제거하지 못하였다면 매순간 내가 쓸데 것에 헐떡거리고 있지 않는지 그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점검하다 보면 어느날 부처와 똑같은 마음이 되어있을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대천제(大闡提)와 같은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믿겠는가?"
학승이 말했다.
"화상께서 힘주어 말씀하시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 사람의 천제인(闡提人)도 찾기 힘들어."
問 如何是大闡提底人 師云 老僧答你 還信否 云 和尙重言那敢不信 師云 覓箇闡提 難得
천제(闡提)는 성불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타고 났으므로 잠재적 부처이다. 그런데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은 깨달음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중생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부처를 회복하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려면 가장 먼저 자신이 원래 부처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천제(闡提)는 불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 자신이 부처임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유일하게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천제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비록 천제가 불신한다 하여도 천제의 성품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천제가 부처를 불신한다하여도 여전히 천제는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천제는 없다는 것이다.
無不禪院 禪院長 石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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